[창작 초회]

 

님의 소리

 

                                                                                 우은주

아빠!

엄마네 아파트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이 열리는데 50대 중반의 아버지와 딸 하나가 그 안에 서 있더군요. 그 아버지와 딸을 보는 순간, 저는 그 두 사람이 아버지와 저로 바뀌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그 아파트, 바로 그 엘리베이터를 아버지와 같이 타고 내려가 아버지 차를 타고 함께 학교 가던 저의 모습. 회사에서 내리시면서 학교까지 잘 가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찡해지는 코끝을 감싸면서 울지 않으려고 나오는 눈물을 억제했습니다. 울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아서.

 

제가 즐겨 읽는 문예잡지에 만해 한용운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님의 침묵’을 읽어보았죠.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 곤색 양복 입으신 우리 아버지께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작은 오솔길로 혼자 떠나시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 시를 좋아하는 까닭은 시인이 님이 떠난 슬픔에 젖어만 있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죠.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버지.

만해 한용운 선생님은 제 마음을 어찌 이렇게 대신 잘 표현해 주었을까요? 떠나신 아버지를 아무리 불러봐도 돌아오는 것은 아버지의 침묵뿐. 처음에 그 침묵은 차갑고 슬프고 절망적이고 회복될 수 없는 나락이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는 지구를 부수어버려도 시원치 않을 만한 분노를 제게 안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연구 방문차 미국에 1년 머물면서 제가 만난 하느님은 제게 절망 속에서 희망을, 슬픔 속에서 기쁨을, 이별 뒤의 만남을 소망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으로 새 희망의 정수박이’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비록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언젠가 하늘나라에서는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아버지를 다시 만나면 사랑한다고 감사한다고, 살아 계실 때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한없이 쏟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 지금 아버지는 육체적 고통도 정신적 스트레스도 없는 평안한 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다는 마음의 위로를 찾았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행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이겨낸 뒤에 맞이하는 담담하지만 여전히 뜨거운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떠나셨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저는, 이제 아버지가 떠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성숙한 애도(mourning)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시인은 이 부분에서 님이 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 자기 마음 속에는 여전히 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 잘 되지는 않지만. 저 또한 아버지가 떠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제 마음 속에 살아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은 그냥 침묵하고 있게 내버려두십시오. 님이 침묵하고 싶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님이 침묵하는 까닭은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아니, 님의 침묵은 ‘님의 소리’입니다. 어쩌면 님은 침묵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 유언도 없이 돌아가신 것은 하실 말씀이 너무 많아서, 그 말씀을 다할 힘이 없어서, 차라리 침묵 속에 아버지의 못다 한 꿈과 사랑과 회한과 당부의 말씀을 담아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히 계속 될 수 있는 말씀으로 남기신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목소리를 영원히 들을 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침묵의 소리는 영원히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저는 오늘 이 시를 읽으며, 아버지의 침묵을 듣는 귀가 열렸습니다. 일본계 캐나다인인 조이 코가와가 쓴 소설 중에 『오바상』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딸이 말합니다. “엄마, 제가 듣고 있어요. 말씀하세요.” 그 소설을 처음 접한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저는 이제서야 주인공 나오미의 마음을 가슴 깊이 이해합니다. 나오미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와의 진정한 교감은 이제부터라는 사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몸은 저희와 함께 하실 수 없지만, 자식들에 대해 지극하셨던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은 항상 저희 곁에 계시다는 사실. 아버지의 침묵은 이제 아버지의 목소리가 되어 제게 들리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외칩니다.

 

“아버지, 말씀하세요. 제가 듣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