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천료]

 

공수空手와 만수滿手

 

                                                                                       우은주

누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나는 가슴 가득히 감추고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또 해가 진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길가의 신호등은 빨간 불과 파란 불을 반복한다. 난 강의를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 시장에 가고 은행에도 가고 텔레비전도 보고 동요를 함께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일상은 나를, 그리고 우리를 정상 생활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정상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식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안 계시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는 이 세상이 정상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버지 서재에서 고장난 시계를 발견했다. 8시 45분 10초에 시계 바늘이 멈춰 있다.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시계가 멈췄던 바로 그 시각,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셨던 것이 분명하다. 단지, 그 시계 혼자서만 시간을 멈추었을 뿐 다른 시계들은 앞으로 한없이 달리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하여튼 그 시계 속의 시간은 내 아버지의 영원한 생존을 의미했다. 난 그 시계를 바라보며, 그 시계를 바라보고 계셨을 지난 시간 속의 아버지와 만나고 있다.

“아버지. 며칠 전, 학교에 가보니 벌써 봄이 와 있었어요. 개나리, 진달래가 무심하게 피어 있더라구요. 유난히도 꽃구경하는 것을 좋아하셨잖아요? 심지어 목련도 피기 시작했더라구요. 이 생명들이 움트는 모습을 도저히 저 혼자 볼 수가 없어서 외면해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생명을 잃었는데 저 새로운 생명들의 탄생이 무슨 소용이랴?

“아빠, 보세요. 이 땅 전체에 흐드러지게 핀 노란, 분홍색 꽃들을. 저렇게 무심히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또 겨울이 오고. 저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계절이 수십 번 바뀌겠죠? 그렇게 아버지 산소 위에도 잔디가 무성해지고, 저희 가슴 속에 있는 아버지의 기억들도 희미해져 가겠죠? 아, 산다는 게, 인생이라는 게, 자연의 섭리라는 게, 왜 이다지도 잔인한 것일까요?”

사랑은 치사랑이 아니라 내리사랑으로 존재하기에 이제껏 인류가 생존되어 왔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 말은 불효자들이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낸 말일까? 아버지를 묻고 온 날 저녁에도 배가 고프다며 밥을 꾸역꾸역 먹었고, 슬픔과 낙담 속에서도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잠시나마 시름을 잊었다. 단지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분의 그늘 아래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의 밥을 먹으며 자랐고, 수줍은 마음에 감사하다는 말씀 한 마디 제대로 해드리지 못하고 나이를 먹어버렸다.

수필집 『인연』에는 좋은 글이 많다. 딸에 대한 피 선생님의 사랑이 과장되지도 치장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그러나 진하게 표현되어 있다. 가족을 한국에 두고 연구년에 가셨는지, 보스톤에서 혼자 다람쥐들과 벗하는 모습은, 딸 서영이에게 과자를 주는 마음으로 다람쥐에게 과자를 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아버지가 20여 년 전 혼자 유럽 여행을 오래 하셨을 때, 아버지도 우리에게 엽서를 자주 보내 오셨다. 아직도 그 엽서 앞장의 사진들이 기억난다. 아버지도 피 선생님처럼 우리 생각을 하면서 유럽의 다람쥐들에게 먹이를 주셨을까?

유학 시절 나는 한국이 그리울 때, 부모님이 그리울 때, 집이 그리울 때, 마음이 허전할 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등대지기'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면 스산한 나의 마음이 조금은 달래지곤 했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자고/ 한 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아직도 가끔 내 마음이 스산하면 창문 밖을 내다보며 이 노래를 부른다.

난 오늘 문득, 이 노래 속의 등대지기가 바로 우리 아버지의 이미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리워했던 이미지, 아직도 내 마음이 울적할 때 불러대는 이미지, 그것은 내 생명의 원천이었던, 그리고 이 세상에서 외롭게 자신의 뜻을 펼쳐나갔던 아버지였다는 것을 말이다.

60년도 4ㆍ19 학생 운동의 주동 세대였고, 70~80년대 열심히 일하여 국가 경제를 발전시킨 그 세대. 그리고 지금은 구세대라 쓸모없어졌다며, 고리타분하다고 젊은 세대에 의해 배척당해 버린 슬프고도 외로운 바로 그 세대. 아버지는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바로 그 등대지기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유언을 남기지 못하셨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나는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한다.

“다른 사람들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공수래만수거空手來滿手去이다. 난 아내,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들까지 다 있으니, 이만하면 많이 가진 것 아닌가. 난 행복한 사람이다.”

오늘도 아이들이 잠든 밤, 불을 밝히고 나는 연구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식인 내가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빈손을 가득 채워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편찮으셔서 돌아가시는 마당에도 자식들이 있어 행복하다고 하시던 아버지. 그분이 못다 하신 꿈을 대신 이루어드리고 그분이 못다 하신 사랑을 세상에 대신 전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반드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허망한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처럼 빈손으로 왔다가도 두 손 가득히 사랑을 채워 돌아가는 인생도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천료소감>

글을 쓴다는 것은 제게 있어 스스로의 상처를 치료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여읜 지 3년여가 되었지만,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던 저는, 글을 쓰면서 저만의 세계에 가두어놓았던 슬픔을 밖으로 꺼내어 형상화시키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무리 `빨간약'을 발라도 딱지조차 앉지 않고 곪아 터지던 제 마음의 상처에 마침내 새 살이 돋기 시작하는 것을 느낍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어여삐 보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좋은 글을 많이 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웃으세요.

아버지,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1967년 5월 18일 서울 출생. 이화여대 영문학과 동 대학원 영문학과 졸업.

미국 로드아일랜드 주립대학교 영문학 석사ㆍ박사. 이화여대 영문학과 강사.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버클리) 영문학과 방문연구원.

현재 서울대학교 미국학연구소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