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리는 가슴

 

 

                                                                               허창옥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볼펜 혹 부위에 잉크 얼룩이 졌다. 기증본을 받은 답례로 몇 줄 글을 쓰고 있는데 손가락에 잉크가 묻은 것이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인 듯하나 내게는 낭패였다. 만년필에 문제가 생겼다. 이게 어디 예사 만년필인가.

지난 봄 백화점에서 무슨 볼일을 끝내고 1층 정문을 향해 무심히 걸어 나오다가 시계 가게 맞은편에 있는 만년필 진열장을 보게 되었다. 날씬하고 매끈하며 빛이 나는 만년필들을 들여다보는데 가슴이 떨렸다.

집에 와서도 만년필은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어떤 소중한 대상을 거기에 두고 닿지 못함을 애태우는 듯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그러한 내 심경의 바닥에는 아마 싸구려 만년필에 대한 기억이 자리하고 있었을 터이다. 만년필을 처음 갖게 된 고등학교 때부터 내 손에 잡았던 몇 개의 만년필들을 기억한다.

그때는 그래도 마음먹고 마련한 것인데 만년필은 촉이 갈라지고 손가락에 잉크를 묻히곤 해서 나를 매우 실망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만년필이 내 분수에 맞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싸구려이지만 그때는 그나마 가질 수 있다는 데 대단히 만족하였다.

다양한 종류의 편리한 필기구들이 나왔고, 무엇보다 이 글을 쓰는 지금처럼 PC의 문자판을 두드리게 되면서 나는 만년필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잊고 지냈던 그것을 다시 만나면서 나는 한 시절을 회상하게 되었는데, 단순히 만년필에 관한 기억만이 아니라 몇 가지의 영상이 함께 따라왔다.

그 시절 나는 걸핏하면 잉크가 새는 만년필로 필기를 하고 편지를 썼다. 잉크가 번져서 공책이 지저분해질까 봐 전전긍긍하였으며 가슴 뛰는 편지를 쓸 때는 한 자 한 자 조심조심 써내려갔다. 그렇듯 몇 개의 장면이 떠올랐고 그 시간 그 공간에 있는 열일곱, 스무 살의 나를 지금의 내가 흑백 영상으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려 삼십 년 저편의 일이다. 백화점에서 만년필을 보고 가슴이 떨렸던 까닭을 알겠다. 놓쳐버린 세월에 대한 그리움, 회귀할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잊어버린 유형무형의 소중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었던 게다. 작고 날씬한 그것이 내내 눈에 밟혔던 것도 이제 도무지 그 무엇으로도 가슴이 떨리지 않는 무디고 나이든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아니었을까.

그런 나를 위로해야 했다. 돈을 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허영이라 매도하지는 말아주었으면 한다. 그 시절이 매우 그립긴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잉크가 새는 싸구려 만년필을 사지 않으련다. 지금의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 자, 욕심을 내보자. 그렇게 스스로를 부추겼다. 하지만 ‘몽블랑’이란 가게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많이 비싸겠지. 너무 비싸면 곤란한데…….

김소운 선생의 수필 『외투』의 그 ‘만년필’을 생각해냈다. 그처럼 깊고 따뜻한 정이 담길 리는 없겠지만 선물로 받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만년필을 갖고 싶으니 선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선물을 주문하다니 그게 선물이 되기나 할까?) 그러마고 하더니 잊어버렸는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두어 달 뒤에(아마 그제야 생각난 게지) 그는 내게 ‘파커’ 만년필을 내밀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교복을 입고 다닐 때부터 내가 갖고 싶었던 게 바로 ‘파커’였다는 걸.

마침내 나는 자주 빛깔의 고운, 뚜껑과 꽂이가 금빛으로 빛나는 그것을 손에 쥐었다. 튜브에 잉크를 채울 때의 충일함과 하얀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움직이며 글씨를 만들어내는 펜촉의 감촉이 참으로 좋았다. 우습게도 나는, 내가 갑자기 멋쟁이가 된 것 같고 낭만적이며 게다가 품격이 높아진 기분까지 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오래 귀하게 여기고 오래오래 간직하리라고 다짐도 하였다.

그토록 특별한 의미로 다시 만난 만년필, 그마저 잉크가 새고 말았다. 그러니 손가락에 잉크가 묻은 것이 나에게는 사소한 일일 수가 없는 것이다. 판매원 아가씨는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본사에 수리를 의뢰한다면서 만년필을 챙겨 넣고 그 사실을 증명하는 명함 크기만한 종이 한 장을 달랑 쥐어주었다.

나는 소중한 무엇을 또다시 놓쳐버린 느낌이다. 3주 정도 걸릴 것이라 하였고 이제 13일째다. 나는 마치 그것이 잃어버린 나를 되찾아주기라도 한다는 듯이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동안 내 가슴은 미세하게 떨리고, 아주 오랜만에 떨리는 가슴이 되어보는 기분이 썩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