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한혜경

얼마 전 대학원 시절 은사의 고희연이 있었다. 고희에 맞춰 선생님의 수필집과 선생님이 지도하시는 수필모임의 공동수필집이 함께 나와 출판기념을 겸해서 이루어진 잔치였다.

평소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으로 들어선 자리는 화사한 한복 차림의 중년여성들로 화안한 빛이 가득했다. 그들은 선생님이 지도하시는 수필모임의 회원들이었는데 화장기 없이 회색이나 검은색 계통의 바지 정장을 입은 우리 대학원 제자들 팀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었다.

돌아가면서 고희 축하 인사말을 하는 순서에도 우리들은 서로 네가 해라, 후배가 나가야지 하면서 빼고 있는데, 그들은 서슴없이 앞에 나가 선생님의 수필 수업이 얼마나 즐겁고 유익한지, 수필을 쓴 뒤 얼마나 생활이 달라졌는지, 시원시원하게들 이야기했다.

그들의 진면목은 행사 뒤 뒤풀이에서 두드러졌는데, 노련한 제스처를 곁들인 노래실력이 모두들 수준급이었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노래하시는 선생님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그 정경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들이 없었으면 오늘 이 자리가 얼마나 밋밋했을까’, ‘선생님이 퍽 좋아하시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수필가이시지만 학문 쪽 전공은 현대소설이어서 우리 제자들은 모두 현대소설 전공자들이다. 50대 중반을 넘어선 선배부터 나를 포함한 40대 제자들, 내 아래로 30대 초반 후배들까지 열댓 명 되는 제자들은 노래하라는 요청에 모두들 고개를 저을 뿐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을 사양하다 다함께 나가서 합창하는 것으로 겨우 예의를 차렸을 뿐이다.

춤을 추며 열창을 하는 그들을 보며 ‘왜 우리들은 흥이 없을까?’ 의문이 들었다. 소설 분석을 열심히 하다 보니 몰입과는 점점 멀어진 걸까. 어떤 정황이든지 단순하게 보지 못하고 이면의 것을 생각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일까. 지금도 웃고 있는 저 얼굴 뒤에 어떤 사연이 있을까를 자동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집에 와서 받아온 수필집을 펼쳐보았다. 회원마다 3편씩 올린 글에는 그들의 일상이 녹아 있었다. 5, 60대 회원들이 많아 손주들과 자식, 남편, 동네 할머니들 이야기가 주로 등장했다. 평생 살림만 하다가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며 희열을 느끼는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친구 말이 생각났다.

수필도 쓰고 동화도 쓰는 고등학교 동창인데 편지쓰기 모임을 이끌고 있다. 주로 주부들인 여성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받는 모임이라는데, 처음 들었을 땐 ‘별게 다 있네’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각 지역마다 지부도 있고 계절마다 책자도 나오는 전국적 모임이었다. 집안 살림 틈틈이 쓴 편지들을 모아 낸 책이니 소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삶의 냄새가 밴 글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회원들 사이에 정이 넘쳤다.

‘살림은 안하고 뭐하는 짓이냐’는 남편의 구박을 받아가며 쓴 글이라 지면에 발표되면 아주 뿌듯해 한다고 친구는 덧붙였다. 가족이나 남편에게 내가 그동안 한 것이 이것이었노라 하고 자랑스레 내밀 수 있는 증명이 된다는 것이었다.

친구도 시골에서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힘겨운 살림 틈틈이 글을 쓰고 발표하다가 수필가의 길에 들어선지라 그들의 애틋한 사연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비록 거창한 작품이 되지 못하더라도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시시콜콜한 삶에서 벗어나 다른 ‘나’가 되는 느낌을 갖는 것이겠지.

생각해 보니 나의 글쓰기에는 그런 절박함이 없는 것 같다. 지리멸렬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준 데 대한 기쁨이 누락되어 있다. 내 삶이 문제가 없었다는 게 아니라 아마도 일의 연속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소설 연구가 일이다 보니 연구와 무관하게 작품을 읽을 때도 순수하게 감동을 느끼기보다 이건 이래서 잘되고, 저건 저래서 좋지 않고 하며 분석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다. 수필을 쓸 때도 어떤 현상에 대한 느낌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살펴보려 한 게 아닐까.

이젠 좀 다르게 보고 싶다.

지나친 수식이나 넘치는 감정 표현을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 부분에도 너그러워지고 싶다. 조금 넘쳐도 위선만 아니라면, 이것으로 위안받고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면 되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 일종의 환상일 수도 있겠지만 빡빡한 삶에서 그 정도쯤 무슨 문제이겠는가.

수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동시대 사람들의 삶이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양상들을 정확히 바라보고 그것을 글로 남기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좀더 삶의 생생함, 따뜻함에 귀 기울이는 연습을 해야겠다. 머리로 다가가지 말고 가슴으로 느끼는 연습도.

 

그리하여 어느 날, 내 글이 갓 잡은 물고기처럼 삶의 느낌이 살아 펄떡이기를 소망해 본다.

 

 

<계간 수필>로 등단(98년).

현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