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내 살아

 

 

                                                                               정정자

나는 매주 수요일 어느 문화센터에 나가 수필 공부를 한다. 공부가 끝나면 바로 점심때다. 다들 그냥 헤어지기 싫어서 함께 점심을 하고 그래도 미련이 남아 찻집엘 들른다. 두 번, 세 번 커피를 리필해 마시면서 아무 영양가도 없는 얘기들로 수다를 떨다가 4, 5시쯤 느지막하게 일어선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은 그 시간이 더 길어져 거의 7시가 다 되어서야 버스를 탔다. 마침 남편이 저녁모임에 나간다고 해서 나도 마음 놓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곧 방방이 불을 켰다. 어둑한 집에 혼자 있으면 공연히 심난하다. 대충 옷을 갈아입었다. 예전 같으면 귀찮은 생각에 저녁 한 끼는 생략했을 법도 한데 뱃속에 아귀가 요동을 쳐 그럴 수가 없었다. 우선 묵은 반찬을 이것저것 꺼내놓고 물 한 컵을 따라 천천히 들이마셨다. 그리고 밥솥을 열었다.

옛날, 내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 느직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다 큰 딸에게 손수 밥상을 차려주시며, “여자라도 크게 되어야 한다” 하셨다. 지금은 지하에 계신 어머니, 크게는 고사하고 살밖에 찐 게 없는 나를 보면 얼마나 한심하실까?

밥공기에 반 주걱 찍어 넣은 밥은 두어 숟가락도 뜨기 전에 다 사라졌다. 여전히 뱃속이 허전했다. 그래서 채소는 살이 안 된다는 말을 생각하고 날고추 두 개를 고추장에 푹 찍어 어적어적 씹었다. 그리고 물 한 컵을 더 마시고 ‘참아야지’ 다시 결심을 했다. 해마다 보약을 지어 먹는 남편은 전이나 지금이나 촛대같이 날씬하기만 한데 보약 한 첩 못 먹은 나는 이게 무슨 청승살인가? 그래도 남편은 가끔 “오늘 굉장히 뚱뚱한 여자 봤어. 자기는 거기 비하면 반도 안 돼. 걱정할 것 없어” 한다. 빈 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싫지는 않다.

점심을 함께 한 수필교실 친구들이 백화점 순례를 할 때가 가끔 있다. 할 수 없이 따라는 가지만 나는 그게 여간한 고역이 아니다. 몸매 좋은 친구들이야 이 옷도 만져보고 저 옷도 걸쳐보고 그게 다 즐거움이겠지만, 술독에 치마 두른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나는 전혀 그렇지가 못한 것이다. 어쩌다 내가 새 옷을 사서 들고 오는 날이면 남편은 꼭 한 마디, “어째 빛따구니도 그렇게 우중충한 것만 맨날 사 들고 오나? 나이 들수록 환한 옷을 입어야 그래도 태가 나지” 한다. 그걸 누가 모르나? 환하고 예쁜 것은 몸에 맞아야 말이지.

올 들어 부쩍 몸무게가 늘었다. 살을 빼야지 하고 내 딴에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강둑길도 걸어보고 헬스장도 기웃해 보고, 등산도 해 보고, 살 빼는 데 좋다는 것은 다 해 보았다. 그러다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무리한 등산으로 하산길에 힘이 빠진 다리가 바위를 들이받은 것이다. 양쪽 무릎이 깨지는 듯 아팠다. 병원엘 갔다. 의사선생님 말씀, “살을 빼셔야 합니다. 당분간은 운동도 하지 말고 층계도 오르내리지 마세요.”

살은 빼야 한다면서 운동도 말라고? 그럼 밥을 줄이라는 이야기다. 아니 나는 그냥 줄이라는 말이 아니고 지금보다 더 확 줄이라는 말로 들렸다.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 한두 잔 마시던 술을 끊었을 때 나는 정말 사는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냥 그런대로 견딜 만은 했다. 그런데 이제 밥까지 확 줄이고 연명이나 하라니 그건 참 기막힐 노릇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의사선생님 하라는 대로 해야지. 참고 참으며 3개월을 버텼다. 겨우 허리둘레 2인치 정도 줄었다. 이제 조금만 더 줄이자. 그러면 백화점에 가서 하늘하늘 나비 같은 원피스도 입어 볼 수 있으리라.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그즈음, 수필교실 친구들은 물론이고 가끔 만나는 다른 친구들도 나를 보고 이구동성으로 한 마디씩 했다.

“아니 살 뺀다며? 근데 그만 빼야겠다. 날씬한 것도 좋지만 얼굴이 너무 늙어 보여.”

빠지라는 뱃살은 안 빠지고(얼굴 살은 좀 빠져서) 반갑잖은 주름살만 늘었으니 그렇게 보일 법도 했다. 살아, 내 살아, 그러니 어쩌면 좋으냐? 그럴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래도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어느덧 5개월째다. 하지만 몸무게는 표 나게 준 게 없다. 살, 이것이 안 빠져나가겠다고 나한테 악다구니를 쓰는 모양이다. 그래, 나가기 싫으면 그냥 있어라. 네가 그런다고 내가 포기할 수는 없지. 나는 이제 먹을 것들 앞에 참는 도道가 아니라 아예 무심해지는 도를 닦아야겠다. 그동안 다리도 웬만해졌으니 다시 걷기나 시작하겠다.

 

지금은 새벽 6시, 어제 뜬 달이 아직도 중천에 걸려 있다. 빈 들녘 마른 풀 위에 무서리가 하얗고 강에는 살얼음이 잡혔다. 갈대가 바람에 서걱댄다. 왕복 1시간 거리 강둑길을 걷는다. 바람이 차서 얼굴이 알알하다. 하지만 마음은 더없이 상쾌하다.

 

 

<수필과 비평>에 ‘삼보이야기’로 등단(2003년).

현 신촌현대문화센타 수필교실 수강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