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얼굴, 다시 읽는 글 2]

 

 

유두영柳斗永(1921~1999년)

 

 

 

<해 설>

 

수필가인 유두영 선생님은 회갑을 지나서야 1982년 <한국수필>을 통해 등단했다. ‘이순耳順’을 넘기면 사람들은 대체로 성격이 젊을 때보다 완고해져서 매사에 독선적이 되거나, 반대로 모난 곳이 없어져 주변 모두에 두루 유순해지는 두 가지 타입으로 갈라지는데, 선생님은 단연 후자에 속하는 분이었다. 1981년에 창립된 ‘수필문우회’에는 1984년에 입회해서 15년 동안 매달의 모임에 언제나 갓 입회한 회원처럼 겸손하게 참석해서 스스로를 사양하고 염치를 차리는 일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썼다. 선생님의 수필세계도 바로 그러한 선생님의 인품을 잘 반영하고 있어, 집안 어른이 사랑방에서 세상 살아온 이야기를 이것저것 구수하게 들려주는 것 같은 푸근하고 편안하면서도 한편 조심스럽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선생님은 서울에서 남자 손이 귀한 집 아들로 태어나 집안 어른들의 따뜻한 사랑 속에 성장했다. 해방 후 늦게 그때로는 드물게 대학을 나와 중,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후반에는 출판사에 근무했다. 은퇴 후 자복子福이 많은 안온한 노후를 보내며 남다른 열정으로 수필을 썼다. 20년이 채 안 되는 집필 기간 동안 쓴 글이 『세월, 그 한 마디』, 『되돌아보기』,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수필집 세 권이 되었다. 이번 기회에 다시 읽고 새삼스럽게 느낀 것은 비록 작은 차이이기는 하나 후반에 쓰신 글이 더욱 순후해져서 ‘종심從心’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는 젊어서 함부로 글을 쓴다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우리에게 통감하도록 해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지막 문집에서 선생님이 한평생 지녔던 성정性情과 수필에 대한 집념을 잘 나타내고 있는 글 두 편을 굳이 골랐다. 선생님의 평소 모습을 다시 대하는 느낌이 드는 글이다.

 

                                                                    ─ 고봉진

 

 

 

수줍음

 

 

연전에 있었던 일이다. 고종누이가 아들 결혼식에 주례를 청탁하기로 승낙을 했더니, 그 날 새 옷을 입고 해 달라면서 양복을 맞추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극력 사양했지만, 굳이 그러겠다는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그를 따라 어느 양복점으로 들어섰다.

더 늙기 전에 밝은 색으로 지어 입으라면서 누이가 직접 감을 골라주는데, 그건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화려한 색상이었다. 하지만 제 돈 내서 해주겠다는 성의를 거절하기가 어려워 그대로 따르는 도리밖에 없었다.

결혼식 날 예식장에 가기 위해 처음으로 입은 새 양복은 청색 계통인데 이삼십대 젊은이나 입을 그런 빛깔이었다. 그렇지만 그 날만은 그 옷을 입지 않을 수가 없지 않은가. 거리에 나서서도 스치는 사람마다 쳐다보며 비웃는 것 같아 고개를 숙이고 걸었고, 주례사를 하는 동안에도 하객들이 내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모두 내가 입고 있는 양복의 색상에만 시선이 모이는 것 같아 얼굴을 붉히었다.

마지못해 하루만 입고는 깊숙이 간직해 두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입던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아내가 가로 막으면서, 어제 예식장에서 보니 참으로 보기에 좋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 늦기 전에 입지 않고 두었다가 호호 노인이 되어서 입으려느냐는 것이다.

나는 생각해 보았다. 거리에서 모든 사람이 비웃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요, 실상 누구 하나 나를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예식장의 하객들도 주례사를 듣기 위해 주례의 얼굴을 쳐다본 것이었을 뿐, 주례의 옷에 관심을 가졌을 사람은 없다. 내가 그 옷을 입고 당황했던 것은 결국 나의 타고난 수줍음에서 온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수줍음을 많이 탔다. 설날 아침이면 새로 지은 설빔을 입고는 까닭 없이 부끄러워져서,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러 가기는 해야겠는데 선뜻 대문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우리 할아버지께 세배 드리러 온 같은 또래들과 어울려서야 함께 나가곤 했다.

그때 우리 동네에서는 학교에 양복을 입고 다니는 아이들이 없었다. 이웃 동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관공서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아이들이나 더러 양복을 입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엔가 뜻밖에도 구식으로만 살아오던 아버지께서 내게 학생복을 사다 주셨다. 나는 안 입겠다고 버티다가 꾸중을 듣고 나서야 입기는 했으나, 학교에 갈 때에도 학교에 가서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선생님께서 좋다면서 만져주셨고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기까지 했건만, 나의 그러한 수줍음의 상태는 꽤 여러 날이 걸린 것 같다.

수줍음이 겨우 사라질 때쯤에 아버지는 양복에 고무신이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학생화인 목구두를 사 오셨다. 그때도 나는 양복을 처음 입었을 때처럼 부끄러워서 많은 고역을 치렀음은 물론이다.

나는 소년 시절에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잘 안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집안 어른들께 꾸중을 들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억울했다. 나는 동네 어른을 뵈면 꼭 인사를 드렸건만 수줍음으로 해서 오해를 받아온 것이다. 나는 어른 앞에 버티고 서서 또랑또랑하게 인사를 드릴 용기가 없었다. 당돌한 짓 같아서였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비켜서서 입속으로만 어물어물 인사말을 하니, 인사 받는 분은 그것을 인사로 여기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체 비켜가는 것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세태가 변해감에 따라 양복에 구두를 신고 지냈으며, 그러는 동안에 내 성격도 많이 닦여나서 어른들을 뵈면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인사를 드릴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천성인 수줍음이 내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내 직장생활의 첫 출발은 중·고등학교의 교사였다. 모 학교에 취직을 하는데, 연구수업을 거처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실 뒤편에는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이 둘러앉아서 나의 수업 태도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슴의 고동소리만 들릴 뿐, 내 목소리가 내 귀에는 통 들리지 않았다. 하마터면 하던 수업을 중단하고 교단에서 내려서고 말 뻔했다. 하지만 수업은 그런대로 괜찮았던지 합격은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교편생활을 계속해 초로初老의 나이로 접어들었을 때, 친구가 찾아와서 아들 결혼식에 주례를 서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사양했다. 오랜 세월 나이 어린 학생들 앞에서는 말을 많이 해 왔지만, 많은 일반인 앞에서 연설해 본 일이 없었으니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내가 그것을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친구네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나가는데 난데없는 차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주례인 나를 모시러 온 차였다. 친구는 나의 거절이 그저 해 보는 인사치레의 사양으로만 알았던 모양이다.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한 시간쯤 뒤에는 예식이 있을 판이니 다시 거절할 수도 없게 되었다. 야무지게 매듭을 지어 거절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차에 앉아 주례사를 꾸며보았다. 그러나 막상 주례석에 서서는 차 속에서 꾸며 온 말이 온데간데없어지고 말았다. 참으로 난처한 십여 분간이었다.

친구 덕분에 홍역을 치른 뒤로는 아는 이들의 아들딸 결혼식 주례를 더러 맡아왔고, 그러는 동안에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는 솜씨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또 한 번 대중 앞에서 수줍음으로 해서 당황한 일이 있다. 그것은 주례사 아닌 축사에서였다. 어느 의식에 참석했을 때, 사회자가 축사의 순이라면서 나를 호명하는 것이었다. 이름이 발표되었으니 안 나설 수도 없어 준비도 없는 축사를 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며칠 전에 지운 스님에게서, 새로 절을 창건하고 낙성식 겸 점안식點眼式을 봉행하는데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이 날아왔다. 그래서 몇몇 법우와 함께 참석했다. 법당에는 많은 고승 대덕大德이 도열해 있고, 수많은 신도들이 법당이 모자라 넓은 절 마당에까지 운집해 있었다. 스님이 축사를 부탁한다.

그러나 나는 승낙할 용기가 없었다. 그 많은 대덕 스님들 앞에서 불교에 조예도 깊지 못한 내가 어떻게 입을 놀릴 수 있겠는가 하는 수줍음 때문이었다. 장엄한 의식이 거의 끝날 무렵, 사회자가 시간 관계로 축사를 생략한다면서 아쉬워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만 나의 수줍음을 또 한 번 꾸짖었다. 귀로의 차 속에서도 후회가 끊이지 않았다. 나의 수줍음은 언제나 사라질 것인가?

<隨筆公苑>(1989. 여름호)

 

 

 

건망증健忘症

 

 

1월 1일날 아침이었다. 일어나면서 아이들이 틀어놓은 TV의 신년 프로를 보다가 우연히 무릎을 칠 정도로 좋은 수필 감을 얻었다. 신년 원단元旦에 좋은 글감을 얻었으니 더욱 기분 좋은 새해 새아침이었다.

본디 보수적인 성품을 타고나서 첨단을 걷지 못하고 언제나 남들보다 뒤진 생활을 해오는 나다. 그래서 남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신정 과세를 해오건만 나는 음력 과세를 지켜왔다. 아이들에게서 신정 연휴에 과세하는 것이 편리하기도 하려니와 시류時流에도 맞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의 제시를 더러 받아왔건만, 나는 그럴 때마다 나 죽은 뒤에 너희들 마음대로 할 때에나 그렇게 하라고 그들의 의견을 일축하면서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자처해 왔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설날이라는 이름으로 구정이 연휴가 되는 바람에 나는 선견지명이나 있었던 듯이 자득自得한다.

그러니 이 날 아침에도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양력의 정초이거니 했을 뿐 별다른 감회가 없었는데, 뜻밖에도 TV 프로에서 좋은 글감을 얻고는 약간의 명절 기분을 느끼면서, 오늘 아침에 한 편의 수필을 완성하겠다는 생각에서 마음속으로 글의 줄거리를 엮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자부가 떡국상에 술까지 곁들여 들여오는 것이었다. 차례는 모시지 않지만 그래도 새해를 그냥 넘길 수가 없어서였던 모양이다. 다른 때 같으면 차례도 모시지 않는데 떡국은 무슨 떡국인가 하고 시들하게 여겼으련만, 이 날따라 새 글감을 얻은 기분에서 따라주는 술을 즐겁게 받아 마시면서 기뻐했다.

떡국에 술 몇 잔을 기분 좋게 마시고 나서, 새해 새아침에 한 편의 좋은 수필을 완성하리라는 생각에서 책상을 대하고 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미 줄거리까지 잡아놓았던 이야깃거리가 술 몇 잔 마시면서 즐거워하는 동안에 온데간데없이 날아가버린 것이다. 대체 어느 이야기의 무슨 말에서 힌트를 얻었던 것인가. 당황해서 다시 TV 장면을 더듬어보았으나 도무지 잡히지를 않는다. 이럴 수가 없는 일이다. 불과 한 시간 전의 일이 아닌가.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기야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나갔다가 저녁에 친구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면서 세정잡사世情雜事를 이야기하다가 문득 글감을 얻는 일이 더러 있다. 그러면 돌아오는 길에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아주 진지하게 한 편의 수필을 엮는다. 그래서 집에 와서는 내일 아침에 원고지에 정리하리라 마음먹는다. 그러고는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 든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는 그 한 편의 수필이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뒤에는 그때그때 꼭 메모를 해 두어야겠다고 벼르지만, 막상 그때 가서는 그 벼르던 생각을 잊어버리기도 하거니와,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많은 사람들 속의 차 중에서 메모하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고, 또 이번만은 잊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도 생겨서 역시 마음속으로만 얽어놓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영락없이 그 이야기는 사라지고, 그러고는 다시 후회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다.

그때의 이야기들은 술도 많이 마신데다가 하룻밤을 자고 난 뒤의 일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오늘 아침의 일은 그런 변명이 통할 수 없지 않은가. 불과 한 시간 전의 일인데다가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 책임을 어디에다 돌릴 것인가. 해묵은 나의 건망증에다 돌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건망증이란 사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한정된 뇌리腦裏에다 그 많은 기억을 고스란히 다 간직해 둔다면 결국 그 머리는 터지고 말 것이기에 말이다. 그러나 근자의 나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하도 심해서 도리어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상태다. 어느 자리에서 꼭 해야겠다고 벼르던 말을 까맣게 잊고 딴 말만 하다가 자리를 파한 뒤에야 아차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예사요, 당장 그 자리에서 하려던 말이 갑자기 흔적 없이 사라져서 그 말을 찾느라고 애를 쓰다가 이내 말을 못하고 다 지난 뒤에야 사라졌던 말이 되돌아오나, 그때는 이미 쓸모없는 말이 된 뒤의 일이다.

더러 무슨 일을 하다가 참고서를 찾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가는 왜 일어났는지를 몰라 도로 주저앉아 싱겁게 픽 웃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는 다시 일을 계속하면 또 생각이 나게 마련이지만, 전화를 받고 상대가 찾는 누구를 대어 주겠다고 기다리게 하고는, 당장 들은 그 누구의 이름을 깜짝 잊어 다시 물어보는 실례를 범하기도 한다.

같은 연배의 벗에게서, 세 살 때의 기억은 생생한데 어제의 일은 전혀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지만, 나의 경우는 세 살이 훨씬 지난 소년 시절의 일들도 어렴풋이 흐린 기억으로 더러 남아 있을 뿐이다. 누가 그런 일들은 현실이 아닌 꿈이었다고 한다면 그런가 보다고 긍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기억밖에 없다.

하지만 나도 한때는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뇌리는 컴퓨터와 같은 작용을 하는 것으로서, 일단 입력이 되면 평소에는 사라진 듯이 죽치고 있다가 필요한 때에 되살아나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지난날의 기억들일 뿐, 근자에는 그것이 입력도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다시는 그 생각이 되살아나지 않는 것이리라. 아마도 낡은 나의 뇌리는 컴퓨터와 같은 기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가 보다.

최근에 건망증으로 해서 하도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했기에 여기 덧붙인다. 결혼 청첩이 날아왔다. 그러나 이름이 전혀 생소하다. 신랑 신부의 이름은 물론이요, 양가 부모의 이름이 다 씌어 있어 여섯 사람의 이름을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모두 기억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내 집 주소와 성명이 분명하게 적혀서 보내온 청첩이니 보낼 만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에서 신랑 집인지 신부 집인지도 모르는 채 시간에 맞추어 예식장으로 갔다.

그런데 신랑의 아버지가 반색을 하면서 반기지 않는가. 나는 어리둥절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나는 평소에 그의 아호를 주로 써 왔기에, 오랜 벗의 이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그런 눈치를 보이면 서운해 할 것 같아 멋쩍게 축하인사를 하고는 피하듯이 식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옛날에 노인들이 자기 나이도 잊는다고 하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듯하다.

<韓國文學>(1990.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