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평>

 

자아와 메타자아

 

 

                                                                                    김영만

‘수필은 자아의 문학이다’라고 하지만, 김윤식 같은 이는 문학이란 모두 자아의 문학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가 확보했다 싶던, 그래서 다른 장르와의 차별성을 구가했던 수필에서의 자아는 어떤 것일까. 수필은 자아와 서술자가 동일하다. 허구와 사실의 차이라고 하면 과연 답이 될까. 그렇다면, 가령 미당의 시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 할 때 ‘나’는 시적 허구일까. 80년대에 이미 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에세이 소설이니, 자전적 소설이니 하는 것들에 등장하는 ‘나’는 또한 어떤 것일까. 소설적 허구일까. 이에 대한 해명이 없는 한 허구의 여부로 수필에서의 자아를 구별하기란 곤란하다.

김윤식은 ‘문학이란 인간(자아)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관계 맺는 교섭 일체를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라 말한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은 자아 즉 ‘나’의 시선이다. 곧 ‘나’의 바라봄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나를 둘러싼 환경이요 교섭 일체, 바로 세상일 것이다. 주체인 내가 객체인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주어와 술어의 문장구조가 이를 웅변한다. 수필 또한 문학인 한 이 범주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나’는 그 시선의 방향이 다르다. 즉 ‘나’의 바라봄은 그 환경과 교섭 일체를 지나 다시 ‘나’ 자신으로 향하는 것이다. 시선의 완전 되돌아섬이다. 이때 ‘나’는 ‘I’가 아닌 ‘Self Matters’다. 세상 쪽으로 내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오히려 내 속에 들어오는 것, 그리하여 그것들로 하여 형상된 나 자신의 모습을 내가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수필은 나 아닌 또 하나의 나를 예비해둬야 한다. 이것을 나는 메타자아라 이름하고자 한다. 이것이 작금, 문학의 빈곤을 비롯한 숱한 문제로부터 수필을 구원하는 원천적인 길이라고 생각을 한다. 가을호의 몇 편을 이런 관점에서 주목해 보려 한다.

 

구양근의 ‘나의 작위적인 행동’

구양근의 수필을 읽고 있노라면 어디서 외마디 소리 같은 걸 듣는 것 같다. 얘기의 절실함이 그렇고 표현의 직절함이 그러하다. 무얼 꾸민다거나 기교를 부린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생각나는 대로 질러대는 소리다. 그런데 묘한 것이 있다. 행간에 흐르고 있는 녹녹잖은 페이소스, 작품 전체를 쥐고 있는 자아에 대한 메타의식이 그것이다.

아내를 잃고 ‘점점 땅으로 꺼져 들어가던’ 어느 날 그는 소스라쳐 일어난다. 그리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이것저것, 이전 같으면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마구 저질러 나간다. 나이니 체면이니 능력이니 하는 것들, 이른바 남들의 시선을 우선 생각에서 지워버린 그는, 그러나 때론 자신의 모습을 낯설어한다. 모두 ‘작위적인 일’의 결과다.

작자는 아내를 잃은 한 교수의 정신적 공황을 오히려 그 교수 자신보다 더 아프게 전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독자들은 마지막 자신을 얻은 듯한 ‘인생 자체를 전환하자’는 말까지 정말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지, 그것까지도 아픔으로 받아들인다.

 

이경은의 ‘세 아들 이야기’

이 작품의 소재는 진부하다 싶을 만큼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이야기다. 이런 흔한 이야기를 흔하지 않은 이야기로 그것도 진한 감동을 담아 전할 수 있다는 것은 작자의 기량이다. 극적 구성력과 역시 자아에 대한 메타의식이다.

스토커란 별명이 붙을 만큼 집착했던 큰아들이 군대를 갔다. 큰아들 보내고 어떡하느냐고 옆에서 먼저 걱정을 하였지만 ‘그런데 참 이상하다’, ‘뭐 별로 눈물도 안 나오고 담담했다’고 했다. 여기 ‘옆’은 사실은 작자 자신이기도 했다. 걱정이 됐던 건 옆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이었다. 괜찮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슬쩍슬쩍 자신을 곁눈질해 본 그는, 그러나 그건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었다. 누가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울음, 그 울음주머니였다. 남편의 전화를 받고 ‘여태까지 잘 참은 사람을 괜히 건드려서는…’ 할 때 독자들 또한 울컥 하고 말았을 것이다.

신은 우리들 가정에 가끔 ‘울음’을 주신다. 그러나 그 울음은 가족들을 다시 하나로 묶는 화학제 같은 것임을 이 작자는 행복한 필치로 보여주고 있다.

 

허세욱의 ‘중산간’

이 작품은 필자가 지금 하고 있는 얘기`─`자아와 메타자아`─`의 한 전범인 듯싶어 생각을 몇 토막으로 나눠 해볼까 한다. 첫째로 작자가 중산간에서 본 건 망망이다. ‘눈을 치켜떠도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이다. 그러나 그는 이 망망을 저만치 두고 감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로 끌고 들어와 그것 망망을, 그 자체를 앓고 있는 것이다. 형용사인 망망을 명사의 자리에 묶을 때부터 그걸 느낄 수 있었다.

‘망망을 보면 당장 눈이 흥건해지면서 가슴이 뜨겁고 목이 메는 징후가 발작했다.’ ‘망망이 어느덧 나의 세포 속에 물들여진 징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저 보이는 것, 저것(대상)을 내 몸으로 육화肉化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앓는다는 것, 우리는 여기서 작가의식의 한 미학을 본다.

둘째, 작자의 시선이다. 이 작자의 시선은 줄곧 자기를 향해 있다. 메타자아인 것이다. 그것은 집요하고도 줄기찼다. 망망을 보면, ‘찔끔찔끔 서러워’ 하는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영원으로 보고 낙원으로 착각하는’ 마음의 병도 보았고, ‘망망에 포로되어 몽유’했던 세월을, 그리고 필경 있을 듯한 망망과의 연緣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주목해 봐야 할 대목은 또 있다. 이 망망까지를 영원 그 자체로 보고 그 안의 자유함을 말하는 작자의 심사이다. 말하지 않아도 될 ‘영원’을 굳이 거론함으로써, 그리고 망망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을 몇 번씩 쳐다봄으로써 오히려 그 스스로에게 영원을 환기시켜주는 작자의 심사. 그는 사실 영원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가장 작아졌을 때 가장 큰 것을 본다 했다. ‘바다 위에 뜬 좁쌀’이 되어 본 그다. 아득한 망망 앞에 존재 그 자체에서 오는 ‘서러움’에 떨어본 그다. 사실 그는 이미 영원을 보았고 그 영원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작자가 예로 든 미당의 대표적 수필에 ‘석남꽃’이 있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은 영원(영생)에 맞닿아 있음을 설파했다. ‘그래야 견딜 마련이어서’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당의 큰 흠결이었음을 그는 끝까지 몰랐던 것 같다. 평론가 임우기는 미당에게는 세상적 삶의 고투 속에 얻어진 ‘그늘’이 없다(‘그늘에 대하여’ 1996, 강)고 비판하면서 그 원인으로 타성화된 영원회귀를 들었다. 그러나 여기 이 작자는 영원, 그것을 앓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역마살을 말하고 방랑을 말하고 불귀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이것이 허세욱 문학의 금도요 숨겨 논 샘이다.

 

끝으로 말해야 할 것은 이 작품이 갖는 음악성이다. 여기서 음은 작자가 고른 씨알 같은 어휘들이고 악은 고저장단의 리듬이다. 일상적 용례를 벗어난 듯한, 아니 그래서 오히려 흐르는 가락 속에 한 가락씩 하고 있는 살아 있는 어휘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수필어의 가능성을 보는 것 같아 설레기까지 한다.

가을호엔 이들 작품 말고도 좋은 작품들이 많았으나 허락된 지면이 부족하여 여기서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