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바람 소리

 

 

                                                                           김형진

동구에 들어서자 맨 먼저 눈길을 사로잡은 건 좌우로 에워싼 산자락 아래 병풍처럼 들어선 대숲이었다. 동네 안길을 몇 구비 돌아 나가자 산골치고는 제법 널찍한 들이 나섰다. 마을 뒤쪽 저만치 그려놓은 듯 둥실한 산봉우리가 느릿느릿 자락을 낮추어 내려오다가 마을 뒤에 제법 널찍한 들을 이루어 놓았다. 오 교수네 집은 그 들머리에 북쪽 벽을 맞대고 동쪽 나지막한 산을 향하고 있었다.

역시 맨 먼저 눈길에 잡힌 건 집 뒤 언덕배기에 둘러선 대숲이었다. 그 대숲 아래 펼쳐진 천여 평 울안엔 투명한 햇빛을 머금은 고요가 충만해 있었다. 마당 머리에는 늙고 구부러진 소나무, 개가죽나무, 한쪽 가지가 썩어 내린 느릅나무, 편백나무 등의 교목들이 울을 이루어 있고, 그 뒤에는 정성스레 가꾼 잔디가 마당을 이루었다. 잔디 마당 북쪽과 서쪽엔 쌓아올린 정원석 사이사이에는 철쭉, 옥향나무, 진달래, 동백나무 등 관목을 심어 그윽함을 더했다.

“이 마당에서 봄, 여름으론 가끔 우리 집 양반이 제자들을 불러 연주회를 열기도 해요.”

잔디 마당은 음악을 전공하는 오 교수의 남편이 처음부터 야외공연장으로 쓸 요량으로 조성한 모양이었다.

정원석 축대는 잔디 마당과 장독대, 창고, 집 들이 있는 생활의 공간을 구분 짓는 경계선 노릇을 하고 있었다. 오 교수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그 경계선 위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마당 쪽 길가에는 몇 무더기 수선화가 노랗게 고개를 숙였고, 안쪽 길가에는 드문드문 늘어선 다복솔이 조용히 엎디어 있었다. 저만치 대밭 언덕에는 파릇파릇 풀빛이 성했다.

나는 전원주택이란 바로 이런 거로구나 생각하며 오 교수의 뒤를 따랐다.  

낡은 양옥은 터에 비해 너무나 작았다. 원주인이 살던 집인데, 부부만 사는 집이라 커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조금 손만 보아서 살기로 했다 한다.

거실에 들어보니 동쪽을 향한 창이 통 유리였다. 앞 산자락 대숲이 통째로 시야에 찼다. 눈길이 유리창 밖 이른 봄 오후의 밝은 햇빛에 잠긴 산골의 풍광에 매달려 있는데 주방 쪽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들리더니 그것이 나중에는 쉬이 스르르, 쉬이 스르르 소리에 어울렸다.

처음에는 물 끓는 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수증기를 내뿜으며 내는 소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수증기 내뿜는 소리와는 다른 가락이었다.

“댓바람 소립니다.”

강 시인이 일깨워주기 전부터 잔물결 반짝이며 흐르는 강물 소리인 듯도 하고 산등성이 억새 잎이 서로 부딪쳐 내는 소리인 듯도 한, 무엇이라고 딱 잡아 이를 수는 없으나 어쨌든 인력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소리가 물 끓는 소리를 흡수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오 교수가 손수 차를 끓여 내었다. 끓여온 작설차를 후후 불어 한 입에 다 마셔버렸다. 좋은 차는 천천히 음미하며 마셔야지 숭늉 마시듯 해서야 되느냐는 강 시인의 말은 귓등으로 흘렸다. 아직도 귀청에 담기는 물 끓는 소리 아니, 댓바람 소리에 사로잡힌 채였다.

“우리 부부는 여기 살면서 몸이 많이 좋아졌어요. 전 위장이 안 좋았고 남편은 신경이 안 좋았거든요.”

감정이 격하던 대학 시절, 여름방학을 이용해 선운사 도솔암에서 한 보름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요사채 뒷방에서 첫 밤을 맞았다. 사위가 고요히 가라앉은 밤중 호롱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으나 쉬 잠이 오지 않았다. 까만 어둠 속에서 초롱초롱 맑아지는 정신에 붙잡혀 뒤척이고 있을 때였다. 쉬이익 쏴~, 쉬이익 쏴~ 귀신 날아다니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중에는 귀신 울음소리로 변하여 밤새 신경을 죄었다. 새벽녘 얼추 든 선잠이 도량경 목탁 소리에 깨어 방문을 열어 보니, 저만큼에 칙칙한 대숲이 음흉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 뒤부터 내 의식 속의 댓바람 소리는 무서운 것으로 자리잡혀 있었다.

그랬는데 지금 이 소리는 귀청에 솔솔 빨려들어 마음을 다독이는 진정제 노릇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댓바람소리가 듣는 사람이 처한 위치와 마음자리에 따라 신경을 옥죄는 소리가 되기도 하고, 음악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되기도 하고, 가슴을 다독이는 독경 소리가 되기도 함을 이제야 알았다.

“유리창에 먼지가 많죠. 유리를 깨끗이 닦아놓으면 새들이 다쳐요. 처음 이사했을 때 참새가 부딪히는 통에 얼마나 놀랐는지…….”

마음은 댓바람 소리에 사로잡혀 있었는데도 눈길은 여직 유리창에 매달려 있었던가 보았다. 짐짓 놀라 눈길을 오 교수에게 주며, “대숲에 참새가 많이 사나 보죠?” 싱거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요, 다람쥐도 살아요.”

오 교수의 입가에는 붉은 매화 같은 미소가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