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후

 

 

                                                                              김숙자

“언니, 오실라우?” “응, 그러지 뭐.”

20여 년을 그녀와 함께 일하다 직장을 그만둔 지 7년째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려오는 목소리. 딱히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절친한 사이는 더더욱 아니건만 수화기를 놓기가 무섭게 마음부터 분주하다.

두서없이 달려온 내가 무안하리 만큼 싱거운 인사. 보일 듯 말 듯 삥긋 웃으며 손을 잡아끌더니 차에 타란다. 한참을 달리던 그녀가 뜬금없이 “언니, 이젠 나도 늙었나 봐. 이사 다니기가 귀찮아서…” 머뭇머뭇 뒷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다가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이사 다니기가 귀찮아서…” 아리송한 표정으로 좀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아담한 동산이 보이는 거실에서 축배를 들었다. 해를 넘기는 동안 그녀에게 무슨 변화가 있었을까. 보금자리는 절대 사절이라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그녀가 그녀만의 보금자리에 문패를 걸어놓았다. 보금자리를 자랑하고 싶었다며 얼굴을 붉히는 그녀. 언제 또 마음이 변해 방랑길에 오를지 모르지만 친구들이여 그녀가 쉬는 동안만이라도 이 보금자리를 외면하소서.

똑똑한가 하면 바보 같은 그녀. 하고 싶은 일만 하겠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더니 남의 치다꺼리 하느라 허리가 휘는 여자. 독신주의도 아니면서 첫사랑에 발목이 잡혀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결혼을 기피하는 여자. 열거를 할라치면 끝이 없지만 직장에서만은 당당하면서도 유능한 일꾼이다.

오래 전 내 직장은 도심 속의 섬 같았던 대방동에 위치한 공군 본부였다.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변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그때는 꽤나 살벌한 곳이었다. 높은 담장에 가시철망을 올려놓고도 모자라 무장한 군인들이 밤낮으로 지키던 곳. 외부를 경계한 것인지 내부를 지킨 것인지 모호하리 만큼 감시가 따랐던 곳이 내 직장이었다. 명령과 절대복종만을 강요하는 군부대의 규율을 젊은 처녀가 감당하기엔 참으로 벅찼다. 그런 내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3년 만에 후배가 생긴 것이다. 그녀는 씩씩했다. 예쁜 얼굴과 상냥한 웃음을 무기로 무엇이든 겁없이 헤쳐나갔다. 이래저래 배짱이 맞아 그녀와 손을 잡고 장애물 같은 관습들을 하나 둘 뛰어넘으며 관록을 쌓아갔다. 어느 날 그녀는 첫눈에 반한 남자와 결혼을 약속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갔다. 스물한 살의 애송이가 언니보다 먼저 결혼을 하겠다니 어느 부모가 승낙할까.

그 후 그녀는 일에 매달렸고 나는 결혼을 했다. 직장과 집을 오가며 아이와 허둥거릴 때 그녀는 내 뒤를 성큼성큼 따라잡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무실까지 대전으로 이전하는 위기를 맞았다. 아이 생각에 직분을 망각하고 장거리 출퇴근을 결정했을 때 반대하는 부서장과 바짝 뒤를 쫓는 그녀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앞서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결혼을 후회했다.

최선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가슴앓이까지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세월인지 아옹다옹하던 직장 시절도 그리움이다. 이것 말고도 세월은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런 반면 좋고 싫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내가 일찍이 경계하던 흐리멍덩한 성격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축배의 자리가 무르익을 즈음 나뭇가지 사이로 반달이 보였다. 예쁜 반달은 누워서 보는 게 제격이라며 그녀가 옆에 있는 쿠션을 던졌다. 쿠션을 받아들고 누울 자리를 살피는 내게

“언니, 참 편안해 보이네.”

“……….”

“근데 이젠 경계할 필요가 없으니 음~ 재미가 없다.”

“너, 이제 매력 없어. 관심 밖이야.”

오지랖 넓은 여자와 흐리멍덩한 여자는 편안하게 배를 깔고 누우며 우문우답을 주고받았다.

 

 

<한국수필>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