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탄川上嘆

 

 

                                                                               고봉진

근년에 들어와서 2개월에 1번꼴로 중·고등 동기들이 모인다. 지방 학교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지역 근린에 사는 친구들만의 모임인데도 많을 때는 3, 40명 정도가 참석한다. 서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웃는 일 외에 별다른 볼일이 없는 만남이다. 그저 식당에 모여 술도 마시고 식사도 하며 한 3시간 가량 한데 어울려 떠들썩하게 잡담을 나눈다.

그 중에는 운동을 같이 하는 사이거나 사업 관계로 자주 만나는 친구들도 섞이지만, 이 모임에서만은 따로 판을 벌리지 않는다. 언제나 공통 화제로 떠드는데 그것은 당연히 재학 시절 추억담이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 누구나 가장 자주 떠벌리는 단골 메뉴는 우리들을 가르쳐주었던 선생님들과 관계된 일화들이다. 지금까지 여러 선생님의 풀 네임을 기억하는 기특한 친구도 있지만, 대개는 그때 우리가 붙였던 별명만 외워서 거명을 한다. 예를 들면 ‘소파 선생’이니 ‘먹보 선생’이니 하는 식이다. ‘소파’는 우리가 어릴 때 좋아하던 유명한 동화작가 방정환 선생 호와 같지만, 실은‘소대가리 파마’라는 말을 축약한 국어 선생님에 대한 별명이다. 얼굴이 보통 사람보다 좀 큰 편인데 곱슬머리였기 때문이다. ‘먹보’는 식욕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지방 사투리로 귀가 불편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들의 소곤대는 소리를 잘 못 듣는다고 사회과목 선생님에게 붙인 발칙한 호칭이다. 어쩌다 실명으로 거명하는 선생님도 있지만, 그런 경우에도 성은 떼어버리고 이름만 입에 올린다. 그래도 그분들은 따로 고약한 별명이 붙지 않았으니 그때 우리들에게는 비교적 인망이 있었던 선생님들인 편이다.

그렇게 자주 선생님 이야기를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배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그분들의 독특한 어조나 버릇에 대한 흉이거나, 얼마나 자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채찍을 들곤 했던가 하는 험담들이다.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도 재미가 있고 모두에게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일까? 동기들이 아니거나 우리와 몇 년 선후배 동문이 아니고서는 옆에서 듣는다 해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잘 알지 못하고, 그것이 왜 우스운지도 잘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공통 암호를 소유한 하나의 집단이고 그래서 강한 연대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 동기 중에는 아직도 서로 책을 돌려보는 친구들이 있다. 책을 읽는다 해도 요즘은 새로운 것을 알기나 즐기기 위해 읽는 경우는 드물다. 처음에는 주로 익히 알고 있는 동서양 역사에 관한 책을 서로 권하고 읽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갸륵한 뜻으로 그런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 역사물에서는 ‘사람이 산다는 것이 다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때늦은 깨달음을 얻는다고나 할까? 책을 읽다가 보면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회상하게 된다. 젊을 때는 그런 책을 읽으면 자기 반성의 아픈 시간이 많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역사책도 읽다가 보면 어쩐지 바동거리는 인간 군상群像들이 보이는 것 같아, 좀더 마음이 편해지는 책 쪽으로 옮겨왔다.

최근에 가장 많이 읽는 책은 단연 『논어』이고, 돌려보는 책도 『논어』에 관한 해설서이다. 어떤 책을 구해 읽어도 『논어』 이야기니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들이다. 책 속에서 여기저기 자주 접하는 것은 원본에 나오는 공자의 낯익은 어구들이다. 저자에 따라서 다 같은 말을 보는 각도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정통적인 해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몇 년 전에 한 친구의 사무실에 동기 네댓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주자朱子의 『논어집주論語集註』를 같이 읽은 적이 있다. 서로 개인 사정이 다르다 보니까 그 모임이 그리 오래 지속은 되지 않았지만, 그때는 각 구절에 대한 신주新註와 고주古註에 대해서 어느 것을 받아드릴까 꽤 열을 올려서 토론도 했었다. 이웃 나라에서는 『논어』에 대한 신간들이 아직 자주 나오는 편이다. 새로 접하는 책들에서 익히 알려진 견해를 만나면 반갑고 마음도 편하다. 가끔 생뚱맞은 의견을 내놓는 글도 만나지만 그런 글은 품위도 없어 보이고 반감도 느끼게 되어 정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책은 서로 일독은 권하면서도 혹평을 한다. 이렇게 책을 서로 돌려보는 일도 어쩌면 머릿속으로 들어와 자기 속에 오래 자리잡고 있는 견해를 다른 동기 친구들도 다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한 곳에 고여 있는 것 같은 친구들도 만날 때마다 더 늙어 보인다. 어쩌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는 서로 잘 알아보지도 못할 때가 있다. 그런 때는 상대의 눈에도 자기가 저처럼 늙어 보이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그런 친구들과 담소를 하다가 돌아오면 어쩐지 어지럼증을 느낀다. 우리 주변에서는 낯선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지하철 역 같은 곳을 빠져나와 도도히 흘러가는 군중 속에 섞이면 소외감에 시달린다. 늙는다는 것이 이곳저곳 몸이 불편해진다는 것임을 깨닫고 서글픈 마음이 들던 일이 어제 같은데, 이제는 주변에 낯선 것들이 하나 둘 자리잡는 대신, 낯익은 것들이 끊임없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상실감에서 더 절실한 슬픔을 맛본다. 어느덧 공자의 천상탄川上嘆이 실감으로 느껴지는 나이에 이른 것이다.

‘흘러가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인가! 밤낮으로 멈추지 않네(逝者如斯夫 不舍晝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