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金星源

받침대 위에 매어 달려 있는 바나나 앞에 멀거니 앉아 본다. 서로 사이도 좋게 늘씬한 몸매끼리 기댄 모습이 탐스럽다. 헤아려보니 스무 개나 빽빽이 달려 있다. 조금 전 3킬로그램짜리 저울에 달아보니 저울눈이 한 바퀴 돌고도 지나쳐서 1킬로그램이나 된다. 이웃 슈퍼에서 안고 오는데 어쩐지 팔이 아프더라니. 쇠로 만든 바나나 받침대지만 견디지 못해 옆으로 쓰러질까봐 약간 걱정도 된다. 희한하게도 이렇게 큰 바나나 다발을 겨우 3천 원을 주고 샀으니 횡재일 뿐이다.

 

사십여 년 전 자욱한 안개 속으로 뒷걸음쳐 본다. 그때는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나 맛볼 수 있는 귀한 바나나였다. 1961년 남편이 미국 유학길에 오른 다음 해 매몰차게도 나는 겨우 세 돌과 첫돌밖에 안 된 두 딸을 친정집에 남겨둔 채 남편이 있는 나라로 건너갔다. 친정어머니는 사위가 바람나면 어쩌느냐며 당신이 외손녀 둘을 맡아 키우겠다고 했고, 그 무렵 나의 외할머니는 며느리와 뜻이 맞질 않아 딸네 집 그러니까 나의 친정집에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외아들인 외삼촌은 가끔 외할머니를 뵈러 누이 집에 들르곤 했는데 그때 할머니 드시라고 귀한 바나나를 사 들고 왔었던 것 같다. 바나나 다발은 안방 다락 위 높은 곳에 숨겨놓았다고 한다. 지금 바나나 값이 비싸고 귀했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어느 날 큰애가 밖에서 놀다 들어오니 동생이 바나나를 먹고 있는 걸 보았지만 외할머니와 외증조할머니는 둘째만 먹이고 첫째는 관심도 없었단다. 바나나가 한 개밖에 남지 않았다면 하나를 둘로 나누어서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린 마음 깊숙이 바나나의 작은 상처는 평생 남아 있는 게 분명하다. 왜 두 할머니들은 둘째만 예뻐했을까. 너무 어려서 불쌍한 마음인지는 몰라도 단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는 미취학 아니 유치원도 가기 전이었는데.

한 번은 두 애가 며칠 친가에서 놀다 왔단다. 모든 할머니들이 궁금해하는 것처럼 “무슨 반찬을 먹고 왔니?” 외할머니가 물으니, “고기” 큰애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기는 무슨 고기 매운 비지찌개 먹었으면서” 둘째가 말꼬리를 완전히 뒤집어놓고 말았다.

형만한 아우 없다더니 큰애는 어려서부터 잔소리가 없이 속이 깊은 애다. 하지만 거짓말을 해서 무안했을 작은 상처는 또 가슴 한 켠에 남게 됐을 게 분명하다. 비교적 욕심이 많은 외할머니는 힘들게 키워봤자 친가 쪽만 생각한다고 얄밉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친할아버지를 어릴 때 두 차례밖에 만나 본 일이 없다. 한번은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고, 그 이듬해는 겨울방학 때였다. 할아버지 댁은 삼팔 이북이라 8·15 이후에는 자연히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손자가 아니고 손녀라 섭섭했는지, 어쨌거나 친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친손녀인 나를 몹시 미워했다. 할머니가 무서워서 찔끔댈 때면 “두고 봐라. 나중에 아들놈 열도 당해 낼 터이니” 이런 할아버지의 어처구니없었던 말씀이 떠오르면 지금까지도 가슴이 아려온다. 마음과 몸이 꼼짝도 하기 싫게 늘어지고 누구를 미워하느라고 괴로워할 때나 좋지 못한 쪽으로 자신이 기울어질 땐 친할아버지 말씀이 떠올라 마음속으로 옷깃을 여미곤 한다.

 

바나나를 바라보며 이제는 오십 줄에 들어서는 맏딸이 떠오른다. 매일 아침 바나나와 오트밀을 먹고 출근하는 것 같은데 제발 어렸을 때 바나나는 잊고 있었으면 좋겠다. 겁 많고 조심 많은 내가 대신 떠올리고 가슴이 불편하면 충분하니까.

나는 바나나를 넘길 때면 한 번씩 목에 걸려 불편하게 넘어가곤 한다. 아들 열을 당할 거라던 나는 이렇게 바보처럼 편안히 앉아 지내며 맏딸은 지금 소화기내과 의사이면서 기러기 엄마이기도 하다.

 

 

<수필공원>으로 등단. 수필산책 동인 부회장.

수필집 『오늘 아침엔 앨가를 듣고 싶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