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비기의 달

 

 

                                                                                     이고운

마을에서 보면, 굽슬한 웨이브로 한껏 모양을 낸 여인의 파마 머리 같은 노송들을 이고 선 동산이다. 마을 쪽으로는 순한 눈길을 주면서도 저쪽으로는 강물에 뿌리를 박고 수십 길 절벽으로 서슬을 세우고 섰다. 그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지조 높은 이 벼랑을 예부터 ‘적비기’라 불렀다.

키는 하늘에 닿아 있고 머리칼이 창공에 곤두선 적비기가 눈을 부라린다. 호통이 벽력 같다. 사람 사는 데를 모르더냐? 동편에서 쏜살같이 달려오던 강물이 기겁을 하며 꼬꾸라진다. 물줄기가 홰홰 내둘리다가 혼쭐이 빠진다. 갈피를 못 잡고 슬금슬금 달아나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함지咸池로 가야 할 몸이 남으로 가고 있다. 다시 물머리를 구비 튼다.

적비기가 있음에 내 고향마을 ‘한빈’은 존재하였을 것이다. 그 층듬 아래 춤에는 구유의 두 배쯤 되는 돌샘이 있다. 그 샘에 이르는 길은 험하다. 동산 아래로 놓인 돌층계를 오르내릴 때는 언제나 조심을 해야 한다. 아침 장독대에 놓이는 정화수 한 그릇, 그 물을 바치는 여인에게는 조바심의 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한여름의 물동이에는 이슬이 맺혀 흐르고, 봄·가을로는 김이 서리서리 피어오르며 물맛이 한시 한결이다. 엄동에도 얼지 않는다. 오히려 넘친 물이 얼어내려 마치 백룡이 강으로 뛰어드는 듯, 강에서 샘에로 용오름을 하는 듯 서늘하다.

적비기의 푸른 발을 씻으며 돌아 나온 물은 인적 없는 한낮의 모래사장처럼 언제나 조요하다. 마을 앞 물 어름을 눈썹 그리며 늘어선 대숲을 따라 머문 듯이 서쪽으로 흘러간다.

달이 밝았다. 고기잡이 가자는 총각들과 처녀들 예닐곱 명이 어울렸다. 플래시를 점검하고 끝을 뾰족하게 삐쳐 대창도 다듬었다. 대숲의 서편에 트인 샛길로 나가면 거기에 강 건너 마을로 오고가는 줄배가 있다. 나루터로 갔다.

예상대로 배는 건너편에 있었다. 그쪽 언덕 밑 오두막에 사는 귀 밝은 사공은 잠이 들었는가. 처녀들은 숨을 졸이며 앉았고 총각들이 조심조심 줄을 당긴다. 움직인다. 빈 배가 천근이다. 자락거리는 쇠줄 소리가 유난하다. 무슨 새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대숲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풀섶의 찌르기도 바람도 침묵한다. 드디어 왔다. 쇠고리를 푼다.

저린 발들이 잽싸게 배에 탔다. 장대로 강바닥을 꼬집는다. 물에 삿대가 꺾이면서 배가 밀린다. 차르락거리는 소리물을 달래며 강을 거슬러간다. 물안개는 솜털처럼 엷게 피어나고 고요가 망망하다. 저 멀리 마을 지붕들이 둥둥 떠 뒤로 멀어진다. 언제 왔던지, 엷은 구름이 열리며 푸른 창공으로 쏟아져나온 빛이 강물에 소나기로 내린다. 처녀들의 상기된 볼은 달을 분 바르고, 총각들은 호기를 부린다. 장대로 물을 치고, 좌우로 발을 굴려 배를 울렁울렁 흔든다. 넘실거리던 물이 왈칵 넘어온다. 처녀들이 ‘옴마야’를 비명 지른다.

대숲을 끼고 적비기를 향해 동쪽으로 오른다. 뱃전에 손을 짚고 플래시를 비추며 강바닥을 들여다본다. 징거미가 화다닥 달아나고 꺽지, 메기, 자라들이 돌틈에 더욱 납작 엎딘다. 수초에 기대어 자던 내 팔뚝만한 잉어가 힐긋 돌아보더니 귀찮다는 듯 꼬리를 흔들며 비켜간다. 숲 그늘로 배를 바싹댄다. 해감을 살풋 둘러쓴, 거뭇하게 구부러진 것이 보였다. 장어다. 꼼짝을 않는다. 팽팽한 긴장이 줄을 당긴다. 곁에 선 머슴아가 대창을 비껴들고 장어를 겨눈다. 예리한 창끝이 푸르게 떨린다. 달이 사람이 물이 숨을 참았다. 그러나 배는 멈추지 않았다. 스스르 미끄러져 간다. 나는 돌아보았다. 삿대잡이가 먼 산에 망연하다. 아무도, 멈추려고도, 왜? 도 묻지 않는다. 이번에는 창잡이가 휘파람을 불며 멀리 창을 던져버린다. 나도 플래시를 끄고 안쪽으로 돌아앉았다. 배엔 달빛만 가득하다. 배 밑이 물 만지는 소리, 먼 마을의 어깨에 이불깃 여미는 소리, 차르르… 사르르… 어느 결에 우리는 오직 아름다움에 취해 그 정물한 순간을 영원의 순간으로 바꾸고 있었다.

적비기 아래로 들어섰다. 벼랑으로 휘어진 노송에 달이 쉬고 있다. 삿대를 저었던 이도 뱃바닥에 앉았다. 손바닥으로 뱃전을 장단 친다.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 달빛 머언 길~’ 내 소프라노가 오케스트라가 되어 물결을 타고 바람에 실린다. 그도 잠이 드려는가. 어느새 기우는 달을 베고, 절벽이 숲 그늘을 보듬고 명경 같은 물밑에 길게 어리광으로 눕는다. 무어라 형용키 어려운 습습한 밤공기가 처녀 총각들 사이로 연기처럼 서렸다. 벼랑 바위 틈에 피어 있는 붉은 산나리 꽃이 가슴에 달무리를 만든다.

배는 혼자 돌아 흐르고, 청운은 날개를 저으며 동산 숲으로 수없이 날아올랐다. 지워지지 않아라, 내 본향 적비기의 달.

 

 

<계간 수필>, <월간 문학>으로 등단.

대표에세이회, 계수회 회원. 개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