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어려움

 

 

                                                                                김태길

(1)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기대할 만한 글을 쓰기가 어려움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모든 독자들이 즐겨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기가 어렵다는 말을 쓰고 싶은 것이다.

어떤 수필 잡지의 편집인이, 나를 우리 수필계의 산 증인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모종의 잡문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반드시 그 추켜세움에 감동한 것은 아니나, 어떤 진실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이 뒤를 따랐기에, 써 주기로 하였다.

 

우선 그 ‘진실을 밝힌다’는 말 자체에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나는 붓을 들었다. ‘진실’은 오직 한 가지 뿐이라고 믿으며 가볍게 붓을 들었으나, 뒤에 알고 보니 ‘진실’에도 여러 가지 얼굴이 있었다.

 장님들이 코끼리의 모습을 더듬는 우화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진실’에도 여러 가지 얼굴이 있을 수 있다.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視角)이 다름을 따라서 같은 사태에도 여러 가지 모습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사태에 대한 묘사도 그 글을 읽는 사람의 시각 여하를 따라서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글 거리가 된 사태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이 없는 일반 독자들은 “그 글 재미있다” 또는 “그런대로 읽을 만한 글이다” 정도로 가벼운 독후감을 갖는 데 그친다. 그러나 그 사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 특수한 독자들의 경우는 같은 글을 읽고도 깊은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다. 일반 독자들의 독후감은 일시적인 느낌으로서 그 때가 지나면 흐지부지 사라진다. 그러나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의 경우는 어쩌면 그 느낌이 원한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글 쓰는 사람은 이 후자의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마땅할 것이나, 나는 어리석게도 그 점을 모르고 붓을 들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필자가 자신을 보호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글 쓰는 사람은 남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이 있는 글에는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어려운 철학적 문제 앞에 서게 된다. 글 쓰는 사람이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써야 할 말은 마땅히 써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어려운 문제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므로, 나는 이 짧은 글에서 결론을 얻으려고 서두르지 않고, 문제를 문제로서 남겨두는 길을 택하고자 한다.

 

(2)

 

여러 해 전에 겪은 일이 떠오른다. 가까운 친구 하나가 그의 첫 번째 수필집을 냈을 때, 나에게 서평을 부탁한 적이 있다. 수필가로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정평을 받고 있던 친구이기도 하기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청탁을 받아들였다. 저자의 비위를 고려하여 없는 말을 쓰지 않아도 할 말은 적지 않을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내가 예측한 바대로, 수준에 달한 글들이 많이 있었다. 사물을 보는 안목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문장력도 탄탄하였다. 나는 거짓말 하지 않고 좋은 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꽤 여러 장의 원고지를 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좋은 점만을 골라서 쓰는 것만으로는 정직한 서평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끝머리에 약간 쓴 소리를 보탬으로써 글의 균형을 잡기로 하였다.

내가 서평의 대상으로 삼게 된 책을 쓴 친구는 본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넓은 의미의 상인(商人)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수필집을 통독했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것은 ‘장사꾼’의 상(像)이 아니라, ‘선비’의 상에 가까웠다. 때로는 불도(佛道)에 언급하기도 하여, 세속(世俗)으로부터의 초탈을 지향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수필은 진솔해야 한다는 것을 지론으로 삼았던 나로서는 그 수필집의 그러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런 점에 아쉬움을 느낀다는 말로 내 서평의 끝머리를 마무리했던 것이다.

이 끝마무리 부분이 서평을 부탁한 내 친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불편하다는 말을 직접 또는 간접으로 들은 적은 없었다. 들은 적은 없었지만 그렇게 추측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친구가 내 서평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평을 잘 읽어 보았다” 또는 “서평 고마웠다” 따위의 인사말이 있는 것이 보통일 터인데, 아무 말도 없었다는 것은 불만감의 간접적 표시라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친구가 내 서평에 대해서 불만을 느낀 것은, 우리나라 서평 문화의 배경을 고려할 때,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서평’으로 불리는 글들은 대부분이 주례사(主禮辭)를 연상케 하는 찬양 일변도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서평 문화에 비추어 볼 때, 내가 쓴 서평은 혹평(酷評)임에 틀림이 없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서평 일반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고 있던 터라 그 서평의 끝머리에 느낀 바대로 소질하게 쓴 것이었으나, 바로 그 점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평 문화에 대한 나의 불만을 한 편의 논설로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나, 내가 쓴 한 편의 서평 가운데 내 불만을 그대로 노출한 것은 큰 실수였다. 공연히 가까운 친구 한 사람을 잃고 만 꼴이 되었음을 깨달은 것은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나는 그 뒤로 ‘서평’이라는 것을 쓴 적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서평도 매우 쓰기 어려운 글의 일종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