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

 

 

김진섭 金晉燮의 ‘생활인의 철학’

 

 

일     시 : 2006년 11월 18일

장     소 : 수필문우회 회의실

참석인원 : 15명

사     회 : 엄정식

정     리 : 이경은

 

 

<본문>

 

생활인의 철학

 

 

철학을 철학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니, 왜냐 하면, 그만큼 철학은 오늘날 그 본래의 사명――사람에게 인생의 의의와 인생의 지식을 교시(敎示)하려 하는 의도를 거의 방기(放棄)하여 버렸고, 철학자는 속세와 절연(絶緣)하고, 관외(管外)에 은둔(隱遁)하여 고일(高逸)한 고독경(孤獨境)에서 오로지 자기의 담론(談論)에만 경청(傾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철학과 철학자가 생활의 지각(知覺)을 온전히 상실하여 버렸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생활 속에서 부단히 인생의 예지(叡智)를 추구하는 현대 중국의 ‘양식(良識)의 철학자’ 임어당(林語堂)이 일찍이 “내가 임마누엘 칸트를 읽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석 장 이 상 더 읽을 수 있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논리적 사고가 과도(過度)의 발달을 성수(成遂)하고, 전문적 어법이 극도로 분화한 필연의 결과로서, 철학이 정치·경제보다도 훨씬 후면에 퇴거(退去)되어, 평상인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呵責)을 느끼지 않고 철학의 측면을 통과하고 있는 현대 문명의 기묘한 현상을 지적한 것으로서, 사실상 오늘에 있어서는 교육이 있는 사람들도, 대개는 철학이 있으나 없으나 별로 상관이 없는 대표적 과제가 되어 있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물론 여기서 소위 사변적(思辨的), 논리적, 학문적 철학자의 철학을 비난, 공격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나는 오직 이러한 체계적인 철학에 대하여 인생의 지식이 되는 철학을 유지하여 주는 현철(賢哲)한 일군(一群)의 철학자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철학자만이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로 인간적 통찰력과 사물에 대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이상, 모든 생활인은 그 특유의 인생관, 세계관, 즉 통속적 의미에서의 철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다음에 말하고자 함에 불과하다.

철학자에게 철학이 필요한 것과 같이 속인(俗人)에게도 철학은 필요하다. 왜 그러냐 하면, 한 가지 물건을 사는 데에 그 사람의 취미가 나타나는 것같이, 친구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그 사람의 세계관, 즉 철학은 개재(介在)되어야 할 것이요, 자기의 직업을 결정하는 경우에도, 그 근본적 계기가 되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의 인생관이 아니어서는 아니 되겠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들이 결혼이라는 것을 한 번 생각해 볼 때, 한 남자로서 혹은 한 여자로서 상대자를 물색함에 제(際)하여 실로 철학은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지배적이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됨을 알 수 있을 것이요, 우리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활을 설계하느냐 하는 것도, 결국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들이 부지중(不知中)에 채택한 철학에 의거하여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이 생활권 내에서 추하게 되는 모든 행동의 근저(根底)에는 일반적으로 미학적 내지 윤리적 가치 의식이 횡재(橫在)하여 있는 것이니, 생활인의 모든 행동은 반드시 어느 종류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소위 이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이상이 각인(各人)의 행동과 운명의 척도가 되고 목표가 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상이란 요컨대 그 사람의 철학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며, 그 사람의 일반적 세계관과 인생관에서 온 규범(規範)의 한 파생체(派生體)를 말하는 것이다.

“내 마음이 선택의 주인공이 된 이래 그것이 그대를 천 사람 속에서 추려내었다.”

고 햄릿은 그의 우인(友人) 호레이쇼에게 말하였다. 확실히 우인의 선택은 임의로운 의지적 행동이라고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인생 철학에 기초를 두는 한, 이상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햄릿은 그에 대하여 가치가 있는 인격체이며, ‘천지지간 만물(天地之間萬物)’에 대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이 인생 생활을 저 천재적이나 극히 불운한 정말(丁抹)의 공자(公子)보다도 그 근본에 있어서 보다 잘 통어(統御)할 줄 아는 까닭으로, 호레이쇼를 우인으로서 택한 것이다. 비단 이뿐이 아니요, 모든 종류의 심의 활동(心意活動)은 가치관의 지도를 받아 가며 부단히,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운명을 형성하여 가는 것이니, 적어도 동물적 생활의 우매성(愚昧性)을 초극(超克)한 모든 사람은 좋든 궂든 하나의 철학을 가지는 것이다. 사람은 대개 이 인생에 대하여 무엇을 요구해야 할까를 알며, 그의 염원이 어느 정도로 당위(當爲)와 일치하며, 혹은 배치(背馳)될지를 아는 것이니, 이것은 실로 사람이 인간 생활의 의의에 대하여 사유(思惟)하는 능력을 가지기 때문에 오직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두말 할 것 없이 생활 철학은 우주 철학의 일부분으로서, 통상적인 생활인과 전문적인 철학자와의 세계관 사이에는,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와 트라지엔의 목양자(牧羊者)의 사이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현저한 구별과 거리가 있을 것은 물론이나, 많은 문제에 대하여 그 특유의 견해를 가지는 점에서는 동일한 철학자인 것이다.

나는 흔히 철학자에게서 생활에 대한 예지(叡智)의 부족을 인식하고 크게 놀라는 반면에는, 농산어촌(農山漁村)의 백성 또는 일개의 부녀자에게 철학적인 달관(達觀)을 발견하여 깊이 머리를 숙이는 일이 불소(不少)함을 알고 있다. 생활인으로서의 나에게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생활 체험에서 우러난 소박, 진실한 안식(眼識)이 고명(高名)한 철학자의 난해한 칠봉인(七封印)의 서(書)보다는 훨씬 맛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현실적 정세를 파악하고 투시(透視)하는 예민(銳敏)한 감각과 명확한 사고력은, 혹종(或種)의 여자에 있어서 보다 더 발견되어 있으므로, 나는 흔히 현실을 말하고 생활을 하소연하는 부녀자의 아름다운 음성에 경청하여, 그 가운데서 또한 많은 가지가지의 생활 철학을 발견하는 열락(悅樂)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하나의 좋은 경구(警句)는 한 권의 담론서(談論書)보다 나은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인생의 지식인 철학의 진의(眞意)를 전승(傳承)하는 현철(賢哲)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무명의 현철은 사실상 많은 생활인의 머릿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생활의 예지―이것이 곧 생활인의 귀중한 철학이다

 

출처 : 1978.<생활인의 철학> 문예출판사판

 

 

사회: 안녕하십니까? <계간수필> 제47호, 2007년 봄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합평 작품은 청천 (聽川) 김진섭의 ‘생활인의 철학’입니다. 요즈음과 같은 때야말로 생활인의 철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주제가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 합평회의 지정토론자로는 김영만, 김진식, 변해명 선생님 세 분을 모셨습니다. 우선 김영만 선생께서 김진섭 선생의 연보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주시지요.

김영만: 청천은 1903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셨는데, 지금 살아계시면 103세로 추측됩니다. 초등학교는 나주에서 다녔고, 1916년 서울로 올라와 양정 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호세이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을 했습니다.

이때에 손우성, 이하윤, 정인섭들과 <해외문학>이란 잡지를 창간하게 되고, 처음으로 우리나라 문학에 해외문학을 소개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1928년 윤백남, 유치진, 이하윤 등과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하고 경성방송국에서도 활동하셨습니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에서 중앙도서관장을 지내셨으며, 서울대와 성대에서 강의를 하시는 등 활동의 폭이 상당히 넓으셨습니다.

1950년, 전쟁의 동란 중에 청운동 자택에서 납북이 되었는데, 다른 분들은 생몰에 관한 자료가 조금 있는데, 이 분은 생몰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 돌아가셨는지 현재 잘 모르고 있습니다.

첫 수필집은 1947년 <인생예찬>이고, 1948년에 <생활인의 철학>, 평론집으로 <교양의 문학>, 납북 후 1958년에 <청천수필평론집>이 나왔습니다.

여하튼 이 분은 수필이라는 독자적인 장르를 개척하시는 데 공헌을 하신 분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회: 말씀 감사합니다. 김진섭 선생은 연보에서 알 수 있듯이 여러 방면에서 활동의 폭이 넓었던 같습니다. 또 한 인간으로서의 함량도 큰 분이었습니다. 1950년에 <교양의 문학>이란 결정판 원고를 출간을 못한 채 납북되었는데, 그 후에 출간이 되어 문학사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김진식 선생께서는 이 작품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김진식: 제가 보기에 이 ‘생활인의 철학’은 하나의 시론적(試論的)인 수필입니다. 한자 낱말을 많이 쓴 강건체이며, 문체는 연결사가 많은 만연체로서 문장의 호흡이 깁니다. 그의 또 다른 경향인 수필 ‘백설부’와는 대조적인 구분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임어당이니 칸트니, 세익스피어와 소크라테스 등등 외래의 유명한 인사들을 들은 것을 보면서 현학적인 요소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여기서는 생활과 괴리된 철학현실을 비판하고 철학의 효용성과 생활인의 철학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이것을 문학성과 결부해 볼 때 정서적인 문제가 상당히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론으로는 그 가능성이 어떨지 모르나 문학성으로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또한 철학자의 전유물이 된 철학 현실을 진단하고, 생활 속의 철학을 인용 하거나 비유를 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생활의 예지를 통해서 일종의 생활인의 철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백설부’에 나타난 표현주의적인 내면의 표출보다는 가치의 효용성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문학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작품에 대해 일반적인 소감을 정리해 봤습니다.

 

사회: 다음은 마지막 지정토론자이신 변해명 선생께서 문학을 통해서 본 작품론 내지 작가론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변해명: ‘생활인의 철학’은 ‘인생예찬’에 이어 청천의 2번째 수필집으로 53편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 생활인의 철학, 命名철학, 여행철학, 금전철학, 감기철학 등 철학이라는 제목을 붙인 수필이 5편이나 되는 것을 보면, 철학이라는 용어를 붙여서 철학적인 사유와 논리적이고 지적인 중수필을 쓰려고 시도한 점이 눈에 띕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 인사로서의 글을 쓰는 자부심이 어떠했나를 짐작하게 합니다.

‘생활인의 철학’은 먼저 철학이 필요 없게 된 현실을 철학자들의 측면과 철학이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 점을 들고, 필자는 자신이 거론하는 철학이 학문적 철학이 아니라 삶과 사물에 대한 판단력과 통찰력임을 제시하고, 삶의 철학을 역설하는 것으로 생활인의 철학을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예컨대, 어떠한 일을 하는 것에는 반드시 그 나름의 철학적 선택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삶에 대한 예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보고 이 예지는 학식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며, 삶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예지이지 지식이 아님을 필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은 철학이란 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자기 나름의 주체적인 철학을 가져야 한다는 작자의 생각을 논리 정연하게 전개한 것입니다. 생활의 예지가 생활인의 귀중한 철학이라는, 철학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관점도 제시했습니다.

이 글에서 작자는 철학이라는 용어를 예지, 신념, 지혜, 통찰력 등으로 변용시켜 설명한 점,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작자의 철학에 대한 깊이와 깊은 사색을 거쳐 나온 것으로, 평범한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것이 철학이요, 그 철학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윤기 있고 개성 있게 해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설득력이 있는 수필입니다.

문장이 난해하고 현학적이며 만연체 문장으로 부연구가 많아 장황한 느낌이 드는 글이나, 1940년대 글로서 오늘날에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점이 선생의 우리글에 대한 실력뿐만 아니라, 문학에 대한 애정과 깊이가 오늘날의 수필을 문학으로 이끈 선구자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사회: 세 분의 지정토론자분들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유롭게 토론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기 전에 현직 철학교수로서 변명 비슷한 것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철학이란 말이 실제로 매우 애매한 것 같아요. 다른 부문과는 달리 흔히 철학교수는 지혜까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의사가 반드시 건강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철학자가 반드시 지혜로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사실 ‘학문으로서의 철학’과 ‘지혜로서의 철학’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혼동해서 쓰고 있거든요. 청천 선생도 이 글에서 혼동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철학1, 철학2, 이렇게 나누어서 써야 되는데, 이 말이 어떨 때는 이 철학이고 어떨 때는 저 철학이고 그래서요. 그런 점들은 우리가 다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여튼 그런 의미로 사회를 좀 잘못시키신 게 아닌 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웃음)

그럼 자유롭게 말씀 좀 해 주시지요.

김시헌: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요즘 말하는 수필에서 볼 때 조금 모자란게 느껴져요. 우선 너무 논리적이다. 묘사라든가 표현 방법이 너무 없고 설명 본위로 나가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주제와 목적이 분명하다. 학문적 철학이 아니고 생활에서 나온 철학, 즉 체험 속에서 나온 철학이 더 중요하다. 체계적인 철학이 아니고, 생활 속에 스며들어가서 생활 속에서 얻어지는 철학을 더 중요시 하고 있다.

요즘 우리가 말하는 것도 그래요. 수필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간단히 말해서 자기 체험을 의미화한 것. 그 의미화가 뭐냐. 의미화가 바로 다른 말로 철학화라고 말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러면 자기의 체험이나 경험을 의미화 한다는 것은 그 속에서 철학을 찾아낸다. 생활 속에서 철학적인 부분을 지정한다. 이런 것들이 아니겠나. 그렇게 볼 때 이 분이 주장하고 있는 체계적인 철학보다 생활인의 철학을 더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수필과 상당히 관련이 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박재식: 저는 수필의 내용보다는 청천의 특이한 문체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필을 중수필과 경수필로 나누어 볼 때, 우리는 흔히 이 분을 우리나라 중수필의 개척자요 태두로 알고 있습니다. 무거울 ‘重’자가 붙는 중수필은 내용이나 문체가 경수필에 비해 무거운 글이라는 뜻이 될 터입니다. 무거운 것이 힘의 부담을 수반한다는 원리에 따라, 무거운 글은 아무래도 해독력에 부담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선생의 수필이 중수필인 所以는 거의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체의 난삽성에 있지 않은 가 싶습니다. 그 난삽성은 의도적인 한자어의 남용과 문법 파괴적인 문장의 구사, 그리고 문맥을 가늠하고 읽기에 낭패할 만큼 굴곡이 심한 구문법의 앙상블이 자아내는 혼란이 아닌가 합니다. 이것이 청천 문체의 특색이기도 합니다만, 이 분은 우정 그런 문체를 통해 중수필의 영역을 개척하려고 시도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일례를 본문의 앞부분에 나오는 ‘철학자는 속세와 절연하고, 관외에 은둔하여 고일한 고독경에서 오로지 자기의 담론에만 경청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구절에서도 잡아볼 수 있어요. 물론 문장은 그런대로 해독할 수가 있지만, ‘관외에 은둔’이라든지 ‘자기의 담론에만 경청’이라는 부적절하고 탈문법적인 어휘의 용법이 눈에 거슬립니다.

이것을 그저 ‘철학자는 속세와 담을 쌓고, 은둔자의 고고한 경지에서 오로지 자기만의 담론에 귀를 기울일 뿐이기 때문’이라고 하면 보다 매끄러운 표현이 될 법한데, 그것은 청천 문체의 특색에 어긋나는 표현법이어서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선생의 문체는 중수필의 문체적 패턴을 정립하는 견지에서도 재검토 되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 그런데 그 난삽성이 의도적이었다는 말씀이시죠?

박재식: 네. 중수필이란 것이 본래 경수필보다는 문장이 까다롭고 딱딱한 경향이 있는데, 의도적으로 내용보다는 문체를 통해서 중수필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 아닌가 해요.

사회: 저는 그 당시에 대개 이런 식으로 쓰지 않았나 생각했는데, 상당히 놀라운 내용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김병권: 우리가 수필을 가리켜 체험을 감성의 철학이나 사상으로 영위시켜서, 표현의 미학으로 형상화 할 때 하나의 수필이 된다. 그만큼 독자한테 다가갈 때 아름다운 문장으로서 바로 이해되고 수용될 수 있는 문장이 됐을 때 좋은 수필이라고 얘기합니다.

특히 윤오영 선생의 수필 법을 보면 평이하고, 간결, 치밀한 문장을 요구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김진섭 선생의 글은 난삽하고 현학적이어서 독자를 이해, 설득, 수용시키기보다는 독자를 점점 거리감있게 하는 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시대의 간격 때문에 그런 오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다른 분의 글을 보더라도 조금 너무 현학적이다.

그리고 말미의 ‘생활의 예지―이것이 곧 생활인의 귀중한 철학이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그 어려운 말을 동원해서 독자에게 오리무중의 어려운 길을 보인 것이 아닌 가해서, 옛날 글로서는 높이 살만할지 모르나 현대수필에서는 재평가해야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사회: 두 분이 같은 점을 강조해 주셨습니다. 그럼 다른 의견은?

허세욱: 우선 연대를 살펴봐야겠는데, 아무래도 이 분이 교편을 잡을 때 쓰지 않았나 싶군요. 사고의 정리, 문제를 종합하는 게 상당히 학원적인 냄새가 나요. 그리고 약간의 대립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선생은 주로 국문과와 독문과의 교양 과목을 가르쳤어요. 그래서 철학교수에 대한 국외자적인 시각이 여기에 많이 스며들어갔어요. 그렇게 본다면 교편을 잡았던 기간인 30년대 말에서 40년대 초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주제는 결국 지식과 지혜에 대한 이야기죠. 역시 지식보다는 지혜가 있는 글을 쓰겠다. 여기에는 시대적· 문학적 배경도 있었던 것 같아요.

1930년대에는 일본도 그렇지만, 특히 중국에는 소품이 굉장히 번성을 했어요. 그러면서 임어당이 고향에서 수필계의 별로 등장한 때가 이때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생활의 발견’은 임어당이 영문으로 쓴 책인데, 그게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두 가지를 비교한 거죠. 그 책에서도 지혜가 필요한 거지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철학은 아니었습니다.

이것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큰 배경이 있어요. 가령 불가에서 돈오와 점오가 있는데, 점오보다 돈오를 더 평가를 해요. 또 중국은 철학이란 말과 사상이 엄연히 달라요. 철학은 원하질 않고 사상을 원해요. 인간의 예지, 체험, 정감이 혼재한 것을 원해요. 그래서 중국의 대철학자들이 지금도 책을 쓰면서 중국사상사라고 쓰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문체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저는 여기에 문체보다는 중수필을 쓰기 위한 개념어가 너무 많아서 ‘지리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사실 내용을 보면 그렇게 난삽한 것은 아닌데 말이에요. 대체로 해방 전 수필에 이런 문체가 많이 유행을 하긴 하는데, 그런 점을 이 분도 모면하지 못한 것 같아요.

또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분이 왜 이렇게 유명했었나. 사실은 이 책이 출판된 것이 50년대거든요. 50년대는 묘하게도 소위 까뮈나 싸르트르 등이 전후의 우리나라를 풍미하던 시대입니다. 제가 ‘생활의 발견’을 읽을 때도 전후의 서구 문화 사상 서적들이 유행할 때인데, 역시 전후에 나타난 현상들이 아닌가. 그래서 이 글이 그렇게 풍미를 했었다. 저는 이렇게 네 가지로 봤습니다.

사회: 아까 임어당에 대해 말씀하셨잖아요? 사실 임어당한테 영향을 안 받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저희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김진섭 선생이 ‘칸트의 책 세 페이지 이상을 못 읽겠다’라는 임어당의 말을 인용했는데, 서양 철학에서는 칸트가 철학의 척추로 되어있거든요. 그래서 특히 임어당이 ‘순수이성비판’을 얘기한 것 같은데, 세 페이지 이상을 못 읽었다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든 그를 철학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임어당의 연보를 아무리 살펴봐도 넓은 방면의 어학은 했지만, 전문적인 철학을 공부한 사람은 아닙니다.

허세욱: 맞아요. 임어당은 철저히 중국의 사상을 주장하는 사람이지 철학자는 아니에요.

사회: 그런데 실제로 현대 중국의 철학자들은 대개 신칸트학파여서, 사실 칸트의 영향을 안 받은 사람은 거의 없어요. 재미난 것은 임어당이 중국말로 쓸 때는 중국 사람의 속물근성을 매도하고, 영어로 쓸 때는 중국 사상의 소중함을 찬양하는 상당히 이율배반적이고 외교적인 자세를 보였거든요. 그런데 김진섭 선생이 이렇게 짧은 글에서 임어당을 우상으로 내세운 것은 글의 의도가 뭔지 너무 분명하다는 거죠.

허세욱: 그래서 임어당이 이 글을 쓰는 데 영향권자로 당당히 오르고 있어요.

 

사회: 다음은 최병호 선생께서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최병호: 인간적인 통찰력과 사물에 대한 판단력을 가진 보통 사람들은 통속적 의미에서 좋든 싫든 하나의 철학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보통 사람이 갖는 철학은 어떤 것일까. 저는 혼자 생각하기를 누구에게나 상식이란 것이 있다. 상식을 행동에 옮기려고 하는 사람, 내적인 것을 생활인의 철학―지혜로 말하는 것인가. 그러면 학문적 철학이 생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떠한 것인가 등등을 스스로 질문해 보았습니다.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사회: 저는 사회자이지 거기에 대답할 만한 사람은 아닌데요. (웃음)  

정진권: 제가 어렸을 때 아는 시골 어르신이 “노끈은 걸고 항아리는 내려놓아라” 하셨어요. 항아리는 높은 데 있으면 깨지기 쉬우니까 내려놓고, 노끈은 가다 걸리니까 벽에 있는 못에다 걸어라. 이런 것이 말하자면 생활의 지혜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또 철학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칸트나 장자를 강의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양반은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을 철학이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 표현하기 때문에 읽기가 참 힘들어요.

강호형: 처음엔 어려웠는데, 다 읽고 나니까 아주 간단해요. 안개 속에서 가시덤불 헤치고, 개천 건너서 가보니까 자기 집에 돌아온 기분입니다. 왜 간단한 얘기를 뭐 때문에 이렇게 어렵게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무식한 사람 겁주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었습니다.

사회: 원래 상식과 철학은 다르지요. 상식은 평상적, 통상적, 일상적이다. 하지만 정상적일 때 상식이 통하는 것이지, 비상식일 때는 상식이 전혀 쓸모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철학은 반드시 상식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상식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상식을 포함해야 한다는 얘기가 철학개론에 나옵니다.

이 분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상식예찬 같은데요. 철학은 상식에 너무 머물러서도 안 되고, 너무 떨어져 있어도 안 된다는 점들을 강조하고 싶어요.

허세욱: 그 두 가지 개념 중에 내가 말하는 것은 철학(philosopy)보다는 사상(thought)이예요. 그때에 그저 생각이 있는 것을 철학이라고 한 거예요.  우리가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정진권: 김진섭 선생이 그저 ‘생활인의 지혜’라고 쓰면 될 것을 공연히 철학이라고 해서 혼란이 온 거예요.

김병권: 맞습니다.

한형주: 우리가 철학적으로 사는 것. 인생이 뭐냐, 죽음이 뭐냐, 사는 의의는 또 무엇이냐. 나이를 먹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데, 그게 철학에 얽혀서 여러 가지 의문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철학교수이신 엄정식 선생이 사회를 보는 덕에 우리가 철학 이야기를 맘껏 물어보고 얘기를 나누니까, 나도 이제 조금 어렴풋이 그 개념을 잡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참 좋은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응백: 이것은 주제가 아주 명확한 거죠. 생활인의 예지가 생활인의 철학이다. 그러면 글을 왜 그렇게 복잡하게 쓰느냐, 간단히 쉽게 쓰지. 사람이 나서 죽었다. 이렇게 쓰면 될 걸 왜 이렇게 복잡하게 쓰느냐. 나는 이 작품은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더듬어가면서, 자기가 생각할 것을 생각하기 위해 쓴 것이라고 봐요.

이 글은 필자가 머리와 가슴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있는 견식을 자기와 같은 수준을 대상으로 쓴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기울여 잘 읽어가면, 마음에 와 닿는 것이 많이 있다. 좀 난삽한 면도 있지만 거기서 사람이 생각을 해 가면서 읽을 수 있게 한 것이 아닌 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회: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작품을 빌어서 새삼스럽게 생활인의 철학과 지혜를 입체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