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아카데미 제13회 강좌요지 】

 

한흑구의 수필과 인간

 

 

                                                                              김 시 헌

수채화 같은 수필

 

수필에서 논의되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 한 가지가 내용과 형식의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내용이 없는 형식은 한갓 화장(化粧)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형식이 갖추어 있지 않은 내용은 문학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내용이 없이도 형식은 존재할 수 있으나 형식이 없는 내용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한흑구 씨의 말이다. 그의 수필을 읽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문장의 정확하고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그림을 그리듯이 선과 색채의 분위기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수필은 시의 정신으로 쓰여져야 한다.’  이것도 한흑구 씨의 주장이다. 수필이 시의 정신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은 수필의 문장이 시와 같이 다듬어져야 한다는 말과도 통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수필에는 사건이 없다. 소설과 같은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그의 수필에는 거의 없다. 이는 시에 사건이 없는 사실과 일치하고 있다. 그의 수필을 어느 부분이든 일부를 적당한 길이로 끊어 놓으면 그것은 훌륭한 한 편의 시가 된다. 그렇듯 한흑구 씨의 수필은 산문시라고 할만큼 시적인 표현으로 일관되어 있다.

‘아름다운 것은 진실하고, 진실한 것은 아름답다’고 한 한흑구 씨의 말은 진선미(眞善美)가 최후에 가서는 미에 연결된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만큼 수필을 통해서 예술을 강조하고 있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철학적인 이데아가 없는 작품은 문학도 음악도 회화도 될 수 없을 것이고, 하나의 예술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도 없을 것이다.’  수필의 내용을 그는 또 이렇게 천명하고 있다.

수채화와 유화를 두고 보았을 때 우리는 수채화에서 김소월의 시와 같은 담백한 서정을 느낀다. 그러나 유화에서는 주지시(主知詩)를 읽는 것 같은 두께를 느낀다. 한흑구 씨의 수필에는 안에 씹혀지는 것이 있다.

한흑구 씨는 일정(日政) 때 미국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평양에서 살면서 항일운동에 가담한 일이 있다. 독립운동 단체였던 흥사단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다가 피검되어 옥고까지 치른 사람이다.

해방 직후에 쓰여진 그의 수필 <보리>를 읽어 보면 추운 겨울과 싸우기 위해서 땅속에서 보리는 굽히지 않는 의지와 인고로써 견디다가 봄이 오자 높고 먼 꿈을 꾸면서 새로운 생명을 회복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보리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한흑구 씨 자신이 치른 항일운동과 우리 민족이 겪어온 조국 광복에의 줄기찬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다. 작자 자신이 의식하지 않은 표현이었다고 하더라도 한흑구 씨는 일제라는 거대한 힘과 대결해서 싸우는 동안 내부가 어느덧 <보리>와 같은 의지의 인간으로 성장되어졌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의 수필에는 공통된 정신이 있다. 그것은 빛을 향해서 뻗으려는 건강하고도 강인한 삶에의 의지이다. 이 의지는 앞에서 말한, 그가 몸소 항일운동을 통해서 몸에 길러 둔 정신의 바탕이다.

<나의 좌우명>이라는 글에서 그는 ‘노병은 죽지 안는다’라는 맥아더 장군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오직 나의 머리 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비도, 안개도, 구름도 아닌 광휘로운 태양의 따뜻한 볕이다.’

이는 그늘지고 연약한 것을 싫어하고 밝고 건강한 것을 선택하는 한흑구 씨의 정신력이다.

‘인생은 빈곤과 권태와 싸우는 것이다’라는 사무엘 존슨의 말을 인용해 놓고 ‘나는 빈곤과는 싸웠으나 권태와 싸워 본 적은 없다. 나는 결코 삶의 권태를 느껴보지는 않았고 오히려 초조함에서 살았을 뿐이다’라고 <나의 벽서>라는 글에서 밝혀 놓고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한흑구 씨는 멈춤이 없고, 항상 전진하는 의욕의 인간이다.

 

그리고 후기 작품에서 그는 남을 위한 사명(使命)의 문제를 빈번히 언급한다.

‘시간의 흐름을 탓하고 운명의 슬픔을 아프게 생각하는 것보다도 나는 저 노목(老木)이 아무 말도 없이 높이 있으면서 다만 그늘만을 잔디 위에 덮어 주는 하나의 사명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노목을 우러러보며>라는 수필의 한 토막이다.

‘냉이와 달래의 속잎들도 민들레와 할미꽃의 가는 뿌리들도 눈은 다같이 따뜻한 이불로 가리어 준다. 지금 오늘의 사명을 다 마친 듯이 눈은 소리없이 그친다. 산에 벌에 나무 위에 또한 지붕 위에 흰 눈은 온 누리를 덮었다. 참으로 커다란 이불이다.’ <눈>이라는 글의 일절이다. 눈처럼 온 누리를 덮어 주고 싶은 노년기의 넓은 마음이다.

사람들의 사상은 대체로 청년기에 싹이 튼다. 무엇을 읽고, 무엇을 생각했으며, 무엇을 겪었느냐의 문제들이 인성의 형성기에 있는 청년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고, 그것이 평생을 두고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선이 굵고 건강한 한흑구 씨의 삶에의 의지는 일제의 암흑기에서 싹이 트고 장년이 되면서 성숙해 왔다. 암흑을 뚫고 빛을 찾으려던 광복에의 줄기찬 의지가 그대로 몸에 배고, 정신에 심어져서 오늘의 한흑구 씨를 만들어 놓았다. 민족과 조국을 위해서 자신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았던 공익(公益)에의 정신이 그대로 남과 나라를 위하는 사명감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한흑구 씨는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서 어떤 소재는 2년 또는 3년씩 생각했다는 말을 한다. 그의 수필이 즉흥적으로 쓰여지지 않고 오랫동안의 저작(咀嚼)과 사색을 거쳐서 창작되어진다는 말이 된다.

어떤 사람은 수필을 직업의 여기(餘技)로 쓰고, 어떤 사람은 휴식 시간에 담배 한 개비 피우는 기분으로 쓰기도 한다. 그런데 한흑구 씨는 수필에다 생애를 걸다시피 진지한 태도로 쓰는 사람이다.

바다가 좋아서 포항을 떠날 수 없다는 그는 6·25 때 서울에서 포항으로 피난 온 후, 줄곧 20여 년 동안을 포항에서만 살면서, 1971년 《동해산문(東海散文)》 이란 첫 작품집을 내놓았다. 그 작품집에는 바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바닷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유유자적 우주와 인생을 관조하고 있는 한흑구 씨는 도인(道人)과 같은 초연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높은 벼슬자리를 권고받은 일까지 있었는데 그는 벼슬에 매력이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는 수필의 소재를 대부분 자연에서 선택하고 있다. ‘나무, 눈, 진달래, 보리, 감, 제비, 바다, 갈매기, 코스모스, 석류, 흙’ 등 어디서나 대할 수 있는 평범한 자연물들이다. 그는 이 자연들을 음풍농월(吟風弄月)식으로 노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과 진실을 찬미하면서 그 속에 든 인생과 우주를 지적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수필은 시의 정신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수필 작법을 그는 소재 선택에서도 실행하고 있다.

시에는 우의(寓意)와 상징과 비유가 있다. 인생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직접적으로는 하지 않았고 대개는 상징과 비유와 풍자의 방법을 쓴다. 이 시의 창작정신이 한흑구 씨로 하여금 자연물을 선택하게 만든다. 곧 시가 인생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듯이 한흑구  씨의 수필도 인생을 직접 말하기 싫어한다. 나무를 통해서 인생을 이야기하고 바다를 통해서 우주를 설명하고 있다.

한흑구 씨는 수필 속에 소리와 빛깔과 냄새까지도 표현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정확한 문장만이 문학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달 밝은 고요한 가을밤에 한가닥 실바람이 불어오면 저 노목은 콧구멍도 입구멍도 아닌 큰 구멍으로 한 가닥 신비로운 소리로 슬픈 노래라도 부를 것 같다’ 노목의 등걸에 생긴 나무 구멍을 보고 표현한 대목이다. 이러한 표현에는 분명히 바람 소리가 들려 오고 있다.

‘울음도 소리도 없는 향기로운 벼 향기가 나의 가슴속과 뼛속을 찌르르 찔러 주는 것 같다. 두 쪽의 가슴을 앞으로 내어밀어 두 콧구멍으로 아침의 새맑은 공기를 힘껏 마시어 본다. 그것은 공기가 아니고, 내음새다.’

냄새를 표현하고 있는 대목이다. 벼 향기를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한흑구 씨는 생명을 사랑한다. 그리고 예술을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다. 그 생명이 무엇에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가? 우리의 주변에 있는 자연들이다. 자연은 신의 창조물이다. 그것에는 영원이 있고, 신비가 있고, 미가 있고, 약동하는 리듬이 있다. 생명 속에 있는 이러한 힘을 바라보았을 때 인간은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을 한흑구 씨는 참지 못하고 글에 옮기고 있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보람을 자기가 선택한 어떤 대상에다 걸고 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 벼슬을 좋아하는 사람, 사업을 좋아하는 사람, 관능적인 탐닉을 좋아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다.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인간에게 청명하고 높은 것을 주는가? 그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인간이 창조한 새로운 생명이다. 그 속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이상이 있고, 흥미가 있고, 새로움에의 추구가 있다.

‘하나의 찰나에서 무한한 영겁을 안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하루라도 참되게, 착하게, 아름답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이라고 하겠습니까?’

참되게 아름답게 살려는 한흑구 씨의 발언이다. 예술은 그러한 염원을 만족시켜 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연은 참되고 거짓이 없다. 거짓이 없기 때문에 곱고 또 아름답다.’

<가을의 숲 속을 거닐면서>라는 수필 속에 나오는 자연에 대한 찬탄이다. 자연에 접근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이와 같기 때문에 한흑구 씨의 수필은 기품(氣品)이 높다. 속물(俗物)이 따라가기 힘드는 높고, 멀고, 참된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은, 한흑구 씨의 수필은 소재가 자연일색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너무 단조롭다는 말을 한다. 한 편 한 편으로서의 작품에서가 아니고, 한 권으로 묶여진 작품집을 읽으면서 앞에 말한 단조로움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한흑구 씨의  수필에는 신변(身邊)의 잡담이 없고, 시정(市井)의 경물(景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흑구 씨의 수필은 시를 읽는 자세로 읽어 가야 한다. 시의 정신으로 쓰여진 글을, 시를 읽는 자세로서 감상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한 작가의 사상과 생활을 작품을 통해서 찾아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작품은 필경 이상의 세계를 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 수필만큼 작자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문학도 없다. 수필은 말 그대로 독백의 문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한흑구 씨의 수필에는 시적인 수법이 쓰여졌기 때문에 비유와 상징과 풍자가 많다. 자신을 이야기하면서도 다른 것에 우의(寓意)하여 객관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어떤 문학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수필은 형식이 자유로워 여러 종류의 수법이 있을 수 있다. 과연 어떤 것이 문학적인 조건을 갖춘 수필이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논의의 여지가 많다. 하지만 한흑구 씨는 수필의 방법 중 독특한 경지 하나를 분명하게 개척해 놓았다.

그것도 시종일관 한 가지의 수법을 고집해 왔기 때문에 한흑구식(式) 수필이라는 한 체계를 확립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흑구 씨는 이 땅의 수필문학을 위해서 넓고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