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얼굴, 다시 읽는 글 ③

 

 

 

― 연재를 시작하면서 ―

 

1981년, 그 글에 그 사람들이 모여, ‘수필문우회’를 창립했다.

4반세기가 넘으면서 그 무대에도 많은 수필가가 부침했다.

다행이 사람은 가도 글이 남았다.

세월과 함께 그 얼굴은 흐려지지만 그리움은 진해진다.

다시 앨범을 펼치면서 그들이 남긴 글을 읽고 싶다.

매호에 한 분, 대표작 두 편씩 뽑고 해설을 덧붙인다.

                                                         <편집인>

 

 

 

윤모촌尹牟邨(1923∼2005)

 

 

〈해설〉

 

윤모촌의 본명은 윤갑병(尹甲炳), 1923년 8월,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에서 출생, 2005년 5월 7일, 숙증 파킨슨 병으로 신고타가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그가 태어난 고향이 경기도 연천, 서울서 지척이지만 지금은 휴전선 군사분계선 속에 꽁꽁 묶여있는지라 멀리 조망하면서 밟지 못하는 고향은 어쩔 수 없이 그 수필의 절실한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젊어서 시를 썼다고 하지만 문단에 정식으로 얼굴을 내민 것은 1979년 그것도 그의 나이 이순을 바라보는 57세에 경쟁이 치열한 신춘문예에 수필을 들고 나왔으니 작은 일에도 정정당당 도전하겠노라는 선비의 마음씨렸다. 그로부터 「정신과로 가야 할 사람들」, 「서울 뻐꾸기」, 「발자국」,「촌모씨의 하루」등 네 편의 수필집에 모두 240여 편의 창작을 바위에 구멍을 뚫듯 진지하고 간결하기에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실기와 이론서 「수필 어떻게 쓸 것인가」로 수필이 허구가 아닌 진실과 진정의 표출임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거기다 모촌의 첫 직장은 일제말 초등학교 교사였었다. 비록 광복과 함께 교편을 놓았지만 그 위인은 그 성품과 함께 그 인생의 격이 되었다. 바로 자기에게 엄격한 만큼 사회의 부정 불의에 대한 질타는 물론 속물 속기의 거부에다 우국우시의 정서로 일관했다.

 그래서 모촌 수필의 주제는 위에서 살폈듯이 향수와 진실추구에 사회 비평이었다. 바로 강직한 선비의 기질이 토양이었고 택선고집이 그 방법이었다. 어쩌면 선비의 품위와 수필의 격을 통일시키는 일이 그의 전부였었다. 그래서 꼬장꼬장했다. 일체의 분식·과장·추상 등을 배제했다. 무엇보다 속물을 보면 노호했다. 그리고 자기의 장기는 대학병원에 쾌척했다. 과연 「윤모촌」다웠다. 그의 깡마른 체구에 깃든 깐깐한 정신이 연구에 잡혔는지 모른다.

그의 최후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진다. 노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 세상이 원망스럽다.

― 허세욱

 

 

서울 뻐꾸기

 

 

이른 아침 뒷산에서 우는 뻐꾸기 울음이 마을에 가득하다. 소나기가 걷힌 뒤라서 물기를 머금은 울음소리가 싱그럽다. 해마다 듣는 소리지만 그놈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까닭도 없이 수심(愁心)에 잠긴다. 화창하면 화창한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처량하기가 그지없다. 봄이 깊어져 여름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성화같지는 않으나, 간간이 바람을 타는 먼 데 소리가 더 은은하다. 심금을 흔드는 울음소리가, 야삼경(夜三更)에 우는 접동새만은 못해도, 봄날 한나절 우는 소리엔 애상(哀傷)하지 않을 수가 없다. 듣는 이에 따라 다르겠으나, 이 강산 깊고 짧은 물줄기의 유역과, 높고 낮은 산자락에서 우는 그놈의 울음은 청상(靑孀)의 한(限)처럼 들린다. 가난하고 서럽던 역사를 정선 아리랑처럼 뽑아내는 것 같기도 하다. 갈라진 산하의 시름을 우는 것 같기도 해서 그 놈의 울음에 고향을 잃은 애상이 도지곤 한다. 한 여름을 울고 돌아갈 때는 산딸기 같은 피눈곱을 달고 돌아간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피눈곱을 달만큼 우는 것이라면, 그놈에게도 까닭이 있다는 말인가. 서울의 복판에서 뻐꾸기 울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서울 뻐꾸기가 처량맞게 우는 것은 서울이 서러워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지만, 호사스런 세월 속에 묻혀 살면서도 왜 슬프게 들어야 하는가. 개구리의 소란스런 울음이나 뻐꾸기의 울음소리 혹은 귀뚜라미 울음 따위에 마음을 쓰게 되는 것은, 삭막한 도시 속에서 아직은 정감의 샘이 남아있다는 증거인가. 새소리 벌레소리 따위를 들으며 산다는 것은 그래서 조금은 다행스럽다. 뒷산의 뻐꾸기는 메마른 마음 밭에 그렇게 물을 준다.  뻐꾸기 울음을 처량하게 들은 것은 옛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자전(字典)에 적혀 있기를 슬피 우는 놈이라 했으니…….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사는 놈이라 하지만, 우리와 정감의 세계가 다른 유럽 사람들도, 슬피 우는소리로 듣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려나, 그 놈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서울 속의 봄이 삭막할 따름이다.  뻐꾸기 울음은 분명 ‘뻐꾹’하고 들린다. 음운 체계에서 오는 의성어가 민족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민족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울음소리가 흥미롭다. 한자명(漢字名)으로 뻐꾸기의 이름은 곽공 (郭公) 또는 포곡 (布穀)이라 적는데, 일인(日人) 들이 말하는 울음 소리는, 곽공의 자기 나라 발음 '각꼬오'이고, 중국 사람은 포곡의 한자음 '뿌꾸'이다. 음운 체계가 다르면 청각도 다르다는 말일까.

중국인의 뿌꾸 풀이가 그럴 듯하다. 뻐꾸기는 봄에 울기 시작하는 새이지만, 씨를 뿌리라(布穀)는 뜻으로 따다 붙인 것이 농경 사회의 대륙인답다. 가뭄 속의 농부들에게 부지런히 씨를 뿌리라며 운다고 노래한 시구(詩句)도 보인다. 서양의 쿠쿠 왈츠로 미루어 보아도, 뻐꾸기는 동서양이 한 가지로 서정의 정감은 일깨우는 놈이다. 야성(野性) 이 강하기로는 유별난 놈인데, 뻐꾸기 울 때쯤이면, 나무를 타고 올라 새끼를 잘 꺼내는 소년이 있었다. 꾀꼬리 새끼나 때까치 새끼 심지어는 까마귀 새끼까지 꺼내다가 길을 들인다고 하던 그가, 뻐꾸기만은 어렵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사람의 손끝에서 자라고 나서도, 마음을 주지 않아 우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창덕궁 뻐꾸기 소리를 들어 보았느냐고 하던 사람의 말이 생각난다. 우는 모습도 여늬 새와는 다르다. 나무의 가장 높은 촛대 끝에 앉아 몸을 돌면서 운다. 방향을 바꿀 때마다 멀리서 들리다가도 이쪽으로 돌면 가까이서 들려온다. 마치 강약(强弱}을 붙여 피아노와 포르테로 우는 격이다. 나는 그렇게 우는 뻐꾸기 모습을 고향 뒷산에서 보아왔다. 생장(生長) 과정도 특이해서 남다른 습속(習俗)을 지닌 놈이다. 제 힘으로 새끼를 치지 못하고,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넣는 것부터가 그러하다. 그런 것만이 아니고, 신세를 원수로 갚는 놈인데, 알 수 없는 것이 조물주의 그 조화이다. 남의 둥지--개개비의 집에 알을 낳아 넣으면 개개비는 제 알보다도 큰 뻐꾸기 알을 함께 품는다. 뻐꾸기 알은 개개비 알보다 먼저 깨어나는데, 이 때 희한하고도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진다. 털도 나지 않은 놈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필사적으로 개개비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천길 아래도 밀어내뜨리는 것이다. 저를 품어 키우는 은인의 알을 하나도 남김없이 밀어내고, 그놈은 개개비의 품을 독점한다. 이런 광경을 TV 화면에서 지켜보고, 배은망덕으로 생존을 잇게 한 신의 섭리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놈의 울음이 사람의 심금을 휘어잡는다. 너누룩하던 하늘이 또 가라앉으며, 한 줄금 비가 시원스레 스쳐간다. 그쳤던 뻐꾸기 울음이 비 걷힌 녹음 속에서 다시 들려오고, 서울의 아침은 소음 속에서 시작이 된다. 녹음의 골짝에서 질펀하게 울던 뻐꾸기 울음 그 소리를, 푸른 산정(山情)에 안겨 듣고 싶다.

(86. 7)

 

 

촌모씨의 하루

 

 

진료실 앞에서 같은 질환으로 온 환자의 말을 듣고, 촌모씨는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다. 그는 지금 파킨슨병이 진행 중인데, 이 병은 3년에 걸쳐 진행을 하다가 결말이 난다고 한다. 2년째인 지금의 상태가 부자유하기는 해도, 아직은 문밖 출입을 할 정도에 와 있다. 그러나 요 23개월 동안에 펜을 잡는 일도 자유롭지 않고, 단지 내 산책보행도 힘들어져 간다. 그런데 진료실 앞에서 만난 환자는, 발병한 지 30년이 됐는데도 등산을 한다는 건강체였다. 그래서 나도 촌모씨의 증세가 현재의 상태로 머물러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그저 희망일 뿐, 앞일은 나도 모르고 촌모씨도 모른다. 그렇다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병이라는 말을 의사로부터 들은 이상, 촌모씨는 정신박약아처럼 탄평하게만 들어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나이가 80에 다다라서, 살 만큼은 살았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촌모씨의 이런 사생관(死生觀)을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니어서, 그가 또 다른 말로 말한대야 별 다를 것이 아닌 것을 안다. 그런 까닭에 인생론자의 말처럼 심오할 것도 없어서 관심이 없다. 한마디로 말해 구질구질하게 살 까닭이 없다는 얘기이다. 사람이 살자면 앞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의욕이 생겨나는 것인데, 그런 것이 아니라면 무엇하러 사느냐가 촌모씨의 지론이다. 그저 사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그런 것에 의미를 두는 이가 있기도 하나, 촌모씨의 경우는 그것이 아니다. 아무튼 오래 살라고 하는 말을 듣는데, 그럴 때면 그것처럼 헛바람 나는 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친구끼리 입버릇처럼 하는 말--어느 날 자는 듯이 편하게 하고 뇌어보는 것인데, 이 같은 소망도 역시 헛되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 까닭에 그가 신앙에 의지하고자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보다도 그는 요즘 들어 부쩍 과거에 대해--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어찌 그토록 자신이 속물적이었던가 하는 자책에 빠지곤 한다. 그러면서 지난날의 할아버지 말씀을 회상한다. 사람은 성명 석 자 정도 적을 줄만 알면 된다고 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고사(故事)를 인용한 말씀이지만, 오늘의 야만화 돼가는 문명사회를 내다보신 듯한 말씀이어서, 촌모씨는 때때로 음미해보곤 한다. 구석구석의 속물화를 말하는 것이지만, 죽은 뒤에나 세우는 문학비 따위를 제 손으로 새겨 세우는 판국이 되었다.

나는 촌모씨가 조금은 편벽스러운 데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가 이 같은 속물적인 것에 타기(唾棄)하는 것은 바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옳은 것은 그르고, 그른 것은 옳다는 식의 정상배(政商輩)의 짓거리라든가, 흥정으로 무슨무슨 상을 탄다는 일 따위가  촌모씨를 편벽스럽게 한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촌모씨의 이런 성벽(性癖)에 관심을 갖지만, 그가 속물적인 것에서 벗어나보려는 것은 찬동할만한 일이다. 이렇듯 그는 스스로가 고립하고,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려는 것이데, 이처럼 자초하는 그의 고립이 그에겐 당연해서 이상하달 것이 없다. 그리고 그는 아파트 13층에서 내다보다가 혼자 중얼거린다. 성명 석 자보다 더 많이 배워서 고급 도둑질을 하는 자들을 두고 하는 소리인데,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절로 입이 거칠어져간다. 사기꾼, 협잡꾼들……, 그리고 전기가 없어도 살던 시절로 돌아가, 인간성이 건강하던 때를 그리워한다. 촌모씨는 오늘의 문명사회가 인간을 버려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늘 하던 버릇처럼 촌모씨는 창 밖을 내다보다가 밖으로 나선다. 단지 내를 돌다가, 벤치에 앉아 행인의 뒷모습을 무념히 보고, 나무를 스치는 바람결을 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것들인데도, 촌모씨는 ‘아, 하늘이 비었구나’ 한다. 그리고 먼저 간 친구를 생각하기도 하는데, 촌모씨에게는 그 친구가 유일한 친구였다. 촌모씨가 그 친구를 경외(敬畏)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속물적인 데가 없는 인격면이다. 가족 말고는 눈물을 흘린 일이 없는 촌모씨가, 그 친구의 영전에선 오열을 터뜨렸다.

촌모씨가 단지 내를 돌 때는 걸음걸이가 남 보기에 좋지 않다. 하지만, 자전거를 탄 아이들이나, 아기를 손잡고 가는 여인의 모습이 그에겐 아름답다. 한 가지 우울한 것은 단지 내의 길목 노점상 주인이 하품을 하는 모습이다. 노점상의 한가한 좌대가 내일이라고 달라질 리가 없다. 그러나 벤치에 앉아서 보는 하늘이 끝없이 푸르고 넓어, 그는 또 아, 하늘이 가득하다 하고 숨을 들이마신다. 그리고 그 하늘을 보면서, 만유(萬有)의 시초이자 귀착지가 바로 거기지 하고 하늘을 바라본다.

(200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