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평]

 

환동, 풍경, 이미지

 

 

                                                                                   김 영 만

1. 가족들, 휴대전화, 내 안의 또 다른 사람

 

글도 무르익으면 환동(還童)의 지경에 이르는 것일까. 위 세 작자의 걸음이 이윽고 여기에 이르른 것이다.

‘가족들’(김시헌). 여기서 작자의 나이는 많아야 5,6세, 스스로는 우정 ‘나는 고령자’라 했지만 그건 소용없는 말씀, 이미 그 생각과 말과 몸짓, 표정이 어린아이로 되돌아와 있는 것. 아파트를 나와 버스를 타는 정류장까지에서의 만남이 그러했다. 그가 만난 것들은 자기처럼 다 숨을 쉬었고 생각을 하였고 말을 했다. 까까하며 대화를 청하는 까치만이 아니라 침묵하고 있는 저 산, 저 하늘이 그랬다. 생기가 넘쳤고 화해로웠으며 착했다. 짖어대는 강아지도 귀엽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를 긴장시킨 건 엉뚱한 대목에 있었다. ‘가족’이란 글제였다. 이 어린아이의 물활론적 자기동일시의 시각이 ‘가족’이란 동포적 개념으로 나가고만 것이다. 동포!, 강아지도 까치도 ‘몸통을 송두리째 내밀고 있는’ 저 산도 다 한 배, 내 동포라 한 것이다. 동양적 사유의 큰 벽, 장횡거의 ‘물오동포(物吾同胞)’에 문득 이르고만 것이다. 이 대포괄, 대긍정의 바다에 이르는 길, 그러나 작자는 이 길은 아파트에서 정류장까지의 손바닥만한 거리임을 보여준다. 환동의 지경이다. 허허담박, 천의무봉의 문장도 그래서 가능한 것이었다.

휴대폰(고임순). 이 작자는 역시 10대, 순정소설의 소녀 주인공, 그의 연인은 휴대폰을 꼭 쥐고 지금 16층 6호 병실에 누워있다. 둘의 연사{戀辭}가 곡진하다. ‘내가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이다’ ‘한 사람의 존재감이 이토록 충만할까’ 소녀의 사랑은 치매한 언어로부터 온다. 상황의 언어와 격절된 세계다. 소녀는 그래서 늙지 않고 아니 늙어도 다시 환동을 한다. 작자는 지금 핸드폰 얘기를 하고있는 중이다. 황지우 시인의 똑같은 글제, 핸드폰 얘기를 기억한다면(실성한 사람들로 거리는 넘쳐나고, 밥 먹었니 하는 육친의 소리까지 기계의 발신음으로 거두어가버리는) 그것과 너무나 대조적인 작자의 말을 듣게된다. ‘저 작은 기계가 바로 나’ ‘황급히 귀에 대고, 금세 웃음이 번져 환한’, 소녀의 눈엔 이 핸드폰이 너무나 고마운 살아 숨쉬는 생명체였다. 사랑의 통로이면서 세상을 향한 촉수이기도 했다. 돌이라도 품어 녹일 수있을 것같은 소녀의 마음, 그러나 그의 이 환동은 모래를 품어 진주알을 만드는 인고의 세월 끝에 꽃처럼 피어난 것인지 모른다. 향기도 그래서 더 짙은 것이리라.

내안의 또 다른 사람 (유경환). 이 작자 또한 10대 소년이다. 스스로 ‘동화 속 겨울 숲 속의 철부지’라 했지만 철부지가 아니라 환동을 한 것이다. 동화란 선형적(線形的) 사고를 허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물소리로 시작되어 다시 물소리로 돌아오는 이 원환의 공간 속에 소년은 상념의 작은 원환을 끊임없이 그려넣고 있었다. 그 원은 서로 자전하며 공전하며 움직이고 있었고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풋풋한 연정을 추억하다가도 문득 ‘정말 소중히 여길 것은 보석같은 기억이 아니라 내일에 대한 바람이다’라고 말을 한다. 내일에의 바람, 나무십자가가 내걸린 뾰족당 안에서의 성찰,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어쩌면 저 ‘손짓하는 마녀’일지 모른다는 생각, 몸과 마음이란 이 실존적 확인이 ‘뒤로 나자빠질 만큼 무거운’ 부담감으로 내리누르지만, 소년은 엉뚱하게도 ‘눈사람’하나를 만들어놓는다. 환동이란 사실 살아가야할 시간을 앞으로 더 늘려놓았거나 아니면 되돌려놓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소년은 지금 다시 그 출발선에 나와 자신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말이었던가. 십유오 지우학(十有五 志于學), 내일을 향한 한 미소년의 감수성이 청보리마냥 밀도 있는 문장 속에 흔들거리고 있다. 놀라운 환동이다.

 

2. 천상탄. 유택

 

수필은 때로는 자신을 풍경화한다. 그러나 풍경이 된 자신은 곧바로 그림의 한구석 점경(點景)의 자리로 밀려난다. 풍경이 말하고 풍경이 몸짓을 할 뿐 자신은 이미 작자로서의 권좌를 잃는다. 위 두 작자가 그린 풍경화는 그럼에도 우리의 머리 속을 쉬 떠나지 않는다.

천상탄(고봉진). 두 달에 한번쯤 모이는 중고등학교 동기회의 광경을  상상할 수있다. 그 왁자한 자리에 자신을 집어넣고 작자는 풍경처럼 그걸 바라보고 있다. 같은 암호를 가진 자들의 낭자한 웃음소리, 그러나  ‘얘기를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왜 그것이 그렇게 우스운지 모르는’ 옆을 의식한다. 해가 갈 수록 유대감은 깊어지겠지만 그에 비해 옆으로부터의 소외감은 점점 더 커질 것을 작자는 간파한다. 이는 돌려읽는 책의 목록이 바뀌고 있는 데서도 감지한다. 그저 맘 편한 책, 생뚱맞지 않는 책을 선호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늙어가는 풍경, 이 글을 읽으며 빙긋이 웃는 이들이 의외로 많을 것이다. 공감의 너울이 고른 호홉의 문장 속에 일렁이고 있기 때문이리라.

유택(김국자). 산벗꽃이 피어 있는 윗대 산소 아래, 양지바른 잔디밭엔  가묘 셋이 만들어져 있다. 언젠가는 그 가묘의 주인들이 될 세 동서가 남편과 함께 환담을 나누고있다. 땅 속에 굴을 파고 죽어서도 가까이 지내자. 거기서도 모여 제사를 지내나. 동서간의 우애와 내외의 사랑과 조상들의 음위가 자연과 함께 한 폭의 풍경을 이룬다. 이런 풍경 속에서는 삶과 죽음, 집과 유택은 길항(拮抗)일 수가 없다. 작자는 사실 풍경화의 요체를 꿰뚫고 있었다. 점경으로 처리될 자신들의 모습은 단 몇 줄, 저 양수리 국수리에서부터 강과 동네와 꽃들과 (작자는 산소까지 오는 길에 7가지 꽃이름을 댄다) 그리고 산을 그린다. 캔버스 안의 구도와 원근과 구성이 그냥 아무렇게나 처리된 게 아니었다. 말미에서의 애교있는 투정, ‘이 세상을 어떻게 떠날 것인가’하는 말까지도 그러했다. 유택의 음습함이 글을 읽으며 오히려 산뜻하게 비워지는 묘한 글이기도 하다.

 

3. 굴, 바나나

 

수필에서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두 작자는 이런 화두를 던지고 있다.

굴(정목일). ‘달빛고요’의 감흥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독자에겐 ‘굴’은 너무나 꺽진 글이다. 허두부터 독자를 다잡아 앉힌다. ‘a는 a다’는 독재자의 어법이다. 실크여행, 병령사석굴과 막고굴에서의 작자는 독자를 계몽한다. ‘----을 하고 싶다’는 말미도 실은 자신을 향한 조용한 다짐이 아니라 북받침에서 터저나오는 소리지름이다. 도대체 이 작자의 이 갑작스런 카리스마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이미지로서의 수필, 수필에서의 이미지에서 찾아야한다. 시는 함축된 언어에 이미지를 담는다. 하여 수사의 한 가닥일 수가있다. 그러나 수필은 12장 내외의 한 편 수필이 하나의 언어로 드러난다. 수사일 수가 없다. 그것 자체로 완성된 미요, 가치다. ‘굴’은 굴이었다. 얘기만이 그런 게 아니었다. 스며 있는 호홉이, 숨결이, 그 낱말, 그 어법이 아니 그 글의 색상과 체온과 무늬가 다 굴의 그것이었다. 그 한 언어가 애오라지 굴로 포개져 있었다. 이미지화 되어 있는 것이다. 이미지화한 수필, 우리는 이를 탐미적이라 할 수 있다면, 달빛고요에서의 변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 충실한 또 한 편의 글을 읽는 것이다.

바나나(김성원). ‘서로 사이좋게 늘씬한 몸매끼리 기댄 모습이 탐스럽다’. 작자가 본 바나나의 이미지다. 육친이란 저런 것이리라, 줄기 하나에 온몸을 기댄 채 송이를 이룬 것, 그 이미지가 하나의 섬세한 언어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작자는 이 육친들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나 미움이 없다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드러냄으로 탐스런 바나나를 형상화한다. 이 글을 다 읽은 독자들은 다시 한번 글제인 바나나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이 짧은 글에 작자가 왜 12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등장시켰는지, 그 어조가 그렇게 낮고 둥글고 부드러웠는지, 소곤거림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모티브이면서 끝말인 바나나, 그러나 작자 자신도 그 바나나의 한 가지임을 큰딸에 대한 애잔한 심정으로밖에 나타내지 않는다. 이미지 수필의 절제된 귀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