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_작_천_료]

 

고소공포증高所恐怖症

 

 

                                                                                          이 종 화

산을 오르며 두려움은 없었다. 목표가 있기에 오르고 또 올랐건만, 오를 땐 그 높이를 몰랐다.  그저 오르는 일, 그 상승(上昇)의 욕구에만 충실했을 뿐이었다. 애써 된비알을 오른 대가는 만족보다는 공포였다. 이제 그 값을 톡톡히 치르는 셈. 바위 위에 위태롭게 의지한 나의 육신은 아슬아슬한 천 길 낭떠러지를 응시하며 바들거린다.

생각해보니, 〈63시티〉를 오를 때도 그랬다. 저기 오르면 세상이 내 것일 것만 같았다. 허나 서울의 빌딩 숲, 그 현대판 바벨탑들을 발아래 두기 위한 여정은 우습게도, 새의 흉내만 낸 꼴이 되었다. 정상에 올랐다는 만족감, 그러나 또다시 밀려오는 허무감. 전날의 씁쓸한 뒷맛이 아직 개운치 않건만, 오늘 산을 오르며 그 유령 같은 욕구에 다시 사로잡히고 말았다.

우리는 항상 오르고 싶은 것 같다. 가난할 땐 넉넉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여기지만, 돈 좀 모이고 나면 더 큰 부자가 되려 한다. 말단(末端)일 땐 첫 승진만을 손꼽아 기다리지만, 정작 원했던 자리에 오르면 더 높은 자리를 탐내곤 한다. 대의(大義)를 이루겠다며 개혁의 선봉에 선 이는, 권력을 잡고 오직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안달한다. 그렇게 우리의 시선은 가진 것보다는 갖지 못한 것에, 아래보다는 위를 향하게 마련이다.

그러는 사이 제 욕심 하나 채우기 위해, 편법(便法)으로 재산을 모으기도 하고, 동료를 밟더라도 높은 자리를 취하려 하고, 약자를 억누르면서 구차한 권력을 보존하고자 한다. 오를 때와 올랐을 때, 그 마음이 이리도 다르기에, 우린 마음 졸이며 기원하던 어제를 잊고 감사보단 아쉬움이 앞서는 오늘을 살게 마련이다. 초심(初心)을 잃은 채,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건 예사요, 사촌이 산 논을 볼 땐 소화에 좋다는 백약(百藥)이 무효다.

그래도 오르는 행위는 탓할 수는 없다. 괴테는 인간의 위대함을, 끊임없는 상승의 욕구에서 찾았다. 운명(運命)이란 본디 리듬을 타듯 오르내림을 반복하는데, 그 부침(浮沈) 속에서 인간은 방황하게 마련이고, 그리 떠돌던 마음은 때로 큰 죄罪를 짓기도 한다. 허나 그것이 선(善)을 향한 긴 여정에서 생긴 일탈(逸脫)에 불과했다면, 인간은 악의 충동 속에서도 스스로를 굳건히 지킨 갸륵한 존재가 된다. 사람이 그리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지닌 끊임없는 상승의 욕구 때문이요, 괴테의 신은 그런 인간을 어여삐 여기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 젊음을 얻었던 파우스트도, 종국엔 구원을 받지 않았던가. 그의 악행은 실로 패륜이었다. 순결한 처녀 그레첸을 유혹해 사생아(私生兒)를 낳게 한 죄, 자신의 사랑을 훼방한 그녀의 가족들을 모두 죽인 죄, 결국엔 사랑하는 그레첸마저 죽음으로 내몬 비정함. 그런 그가 이 모든 패악(悖惡)을 씻고 하늘나라의 부름을 받는다. 악마조차 이해하지 못한 그의 천국행은, 상승이 비록 죄인(罪人)을 만들어냈지만 궁극의 구원으로 인간을 이끌었음을 암시한다.

우리도 파우스트처럼 오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가치는 선(善)에 있었다. 결코 금전이나 자리, 혹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에 있지 않았다. 파우스트 역시 우리처럼 오르고 또 올랐지만, 그의 높음은 우리가 지닌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꿈과는 다른 것이었다. 남들이 오르니 나도 힘껏 올라야 하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타인보다 높기 위한 우리네의 여정은 많은 이를 발아래 두어야 의미가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얻으면 잃을 것이 두렵고 날면 떨어질까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아래만 보면 머리가 어지러운 것이리라. 그렇게 현대인은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며 매일을 산다.

몹쓸 병에 걸린 환자가 그 병을 외면하듯,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짐짓 아래를 보지 않는다. 그곳까지 올라온 자신이 대견하기 보다는 아직도 까마득하게 남은 상승의 여정으로 불만스러울 따름이다. 그렇게 우리의 생활은, 상승 속의 침전을 거듭하고 만다.

상승의 욕구. 난 그것을 탓하고 싶지 않다. 다만 달이 차면 기울듯 올라가면 반드시 내려올 때가 있으며, 시작이 있으면 그 맺음이 있어 만남의 기쁨 끝에는 별리(別離)의 슬픔이 기다리면서도, 추운 겨울이 길면 봄의 문턱도 머지않음이 자연의 순리요 생의 등마루임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올라가서 불안에 떨기 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낮은 곳으로 임하는 건 어떨까. 버리면 오히려 얻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진리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도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지나친 비약일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