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뒷모습

 

 

                                                                                     金奎鍊

봄나들이 나간다.

찬란한 풍광을 줄줄이 거느리고 스쳐가는 봄의 뒷모습은 허전하다. 연모 해 온 정인이 떠나가버린 듯.

나는 늘 이맘때면 가슴의 한 자락에 이는 찬바람과 낙엽을 느끼며 바깥을 나돌아 다녀야 한다. 되도록 많은 사물에 시선을 던지고 온갖 상념을 끌여들여 가슴속의 수수함을 행궈 낸다.

지하철을 타려고 발걸음을 뗀다. 행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얼굴도 입새도 처지도 다르고 생업과 형편과 관념도 서로 상이하다. 허나 하나씩 밝혀든 혼불은 똑 같다고 하리라. 그들이 있기에 내 삶이 지탱되는  소중한 이웃들이 아닌가.

성당못역에서 1 호선을 탄다. 평일 오전 10시 인데도 좌석이 꽉 차있다.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젊은이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휴대전화를 들고 손가락으로 꾹꾹 찌르면서.

언제부터인가 지하철 공짜로 타고 눈 지그시 감고 앉아있는 노인을 「지공선사」라 하고 할머니는 「지공여사」라 한다던가. 2 호선에 환승하려고 반월당역에서 내리다. 환승역은 넓고 복잡해서 동서남북 방향이 헷갈린다.

안내판을 읽으며 흐르는 인파를따라 문양향 2 호선에 오르다. 실내에는 온통 노인 천지다. 무리지어 탄 지공선사와 지공여사들은 뭣인가 뜻을 모으려고 떠들석하다. 어느 노인대학 동창인 모양이다.

나는 곁에 앉아있는 젊은 승려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본다.

―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 하안거 들기 전에 만행(萬行)을 하려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가 종착역에 다다르기까지 이어진다.

문양역에서 내리다. 문양리는 달성군의 한 촌락이다. 공기가 상큼하고 달다. 심호흡을 하며 전방을 바라본다. 나직나직한 산과 산이 서로 보듬고 앉아있다. 지나가던 봄이 잠시 산에서 멈칫거리고 있는 것일까. 산벚꽃 나무에 아직도 흰 구름이 감돌고 있다.

맑은 산새  소리와 도랑물 소리, 나물 뜯는 아낙들의 웃음 소리가 귀바퀴에 와 부딪쳐 흐른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을까. 혼자인데도. 그냥 좋다고하리라.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우리 가곡 「동심초」를 비음(鼻音)으로 불러 본다.

저만치 무논에서 소와 함께 쟁기질하는 농부에게 눈길이 멎는다. 예전에 영양땅 행곡령(行哭嶺)에서 봤던 화전민 부부의 밭갈이 광경이 대입되어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그들은 소가 없기에 여자가 지게를 지고 거기에 소 멍에를 걸어 끌어당긴다. 남편은 뒤에서 쟁기를 밀며 땅을 깊이 갈려고 용을 쓴다. 아내의 지게와 남편의 쟁기 사이에 이어진 두 가닥의 타줄이 율동을 한다. 팽팽했다 느슨하고 느슨했다 팽팽하고.

타줄의 역학관계 속에서 부부의 지순한 애정이 오가고 있음을 읽는다. 다음 순간 타줄이 한 가닥 더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내와 남편의 가슴과 가슴 사이에 인연의 타줄이 이어져 있지 않는가. 이 타줄을 통해 서로가 지녀온 삶의 방식과 보람과 애환이 물들어 가고 옮아 가고 닮아 가리라. 마침내 기쁨과 눈물을 같이 느끼는 한 몸이 되는 것인가.

그 승려가 흘리고 간 언어들이 불쑥불쑥 살아나서 고함을 질러댄다. 「중생제도는 타력으로 안되고 자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무릇 사람들을 우선 돈병, 색병, 이름병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가슴속에서 긍정과 부정이 교차한다.

세상의 모든 패륜과 악과 범죄는 근원에 그 병이 숨어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만백성이 모두 무소유와 금녀와 무명을 화두로 달관해서 선지식(善知識)이 된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것인가. 과연 안락과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으로 바뀔 것인가. 아니면 재물이 고갈되고 인구가 줄어들며 문화예술이 사라져서 삭막하고 황량한 세상으로 전락할 것인가.

정답은 무엇일까. 어쩌면 만민의 영혼을 인도할 선지자는 기십명이면 족하지 않을까.  사람에게는 식욕, 수면욕, 성욕, 소유욕, 명예욕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능을 누리고 즐기고 받아들이는 것도 본능의 종류와 사람의 그릇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사람의 그릇은 저마다 별나다.

자기의 그릇이 채워지도록 뜻을 세워 살다보면 성취와 획득과 영광의 기쁨도 있고 패배와 좌절과 고통의 슬픔도 있으리라. 이것이 범부의 삶이 아니겠는가. 범부들의 삶이 활기차고 건강하고 분주할수록 세상은 더 나아지질 않을까. 고쳐야 할 병은 자신의 그릇도 모르고 분수도 모르고 자족할 줄 모르는데 있으리라.

 

마음에 점을 찍으려고 식당에 들린다. 삼 십여명의 노인대학 동창들이 식사를 하며 온갖 환담을 즐기고 있다. 육 십대 후반의 젊은 노인들인 듯 싶다. 그 중 몇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 늙은이가 혼자서 왠 일이냐며 합석할 것을 간곡히 청한다. 나는 그들과 섞여서 논메기 매운탕이며 막걸리 두어 사발 들이키고 앉아 있다. 부끄럽고 무렴하다.

그들의 화제는 노인사고(老人四苦)에 관한 얘기다. 늙으면 찾아오는 할일 없는 무위고(無爲苦), 외롭고 쓸쓸한 고독고(孤獨苦), 온 몸을 침노하는 병고(病苦), 차츰 빈털털이가 돼 가는 빈고(貧苦)를 어떻게 피해 갈것인가 이다. 갖가지 방책이 쏟아져 나온다. 노인사고는 자연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자연현상은 그냥 조용히 수용해서 그들을 즐기며 사는 것이 묘책이 아닐까.

 

복사꽃 빛깔의 깃발을 앞세우고 지나가는 봄을 아쉽게 환송한다. 봄은 무심히 왔다가 무심히 가는데 부질없이 흔들리는 이 마음을 어찌하랴. 이것이 거짓없는 내 심사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