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받은 연하장

 

 

                                                                                    변해명

오늘은 어머니가 환히 웃고 계시다. 손자와 증손자의 연하장을 받으셨으니 얼마나 흐뭇하실까. 증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어르시는 어머니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연하장이 놓인 어머니 영정 앞에 앉아 저녁 인사를 드린다. ‘어머니, 증손자가 대견하지요? 많이 컸지요? 4살인데 가족 이름을 다 쓸 줄 알아요. 어린이집에서도 여자 친구가 있다고 자랑을 해요, 둘째는 돌 때 뛰어다녔으니 형이 하는 것이면 모두 따라 하려고 해서 옷도 장난감도 똑같이 해줘야 한데요. 그래도 손자 대에서는 아들이 둘이에요.’

어머니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계시다.

연말이 되면 함께 살지 않는 형제나 친지들이 연하장을 보내온다. 이번에도 연말과 크리스마스를 겸한 조카네 가족이 보내온 연하장이 배달되었다. 나와 언니, 동생 등 고모에게 보내는 연하장과 함께 어머니에게 보내는 연하장이 함께 배달되어 왔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놀랍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억 못할 손자도 아니어서 의아한 가운데 어머니 앞으로 온 연하장을  뜯어보았다.

 

사랑하는 할머님께

비록 저희와 함께 계시지는 않지만, 할머님은 항상 저희 마음에 계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또 천국에서도 저희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축복해주시고, 잘되라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나라에서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증손자 현준, 현민 그리고 손자 승원, 문숙올림

 

끝에 이름은 네 살짜리 증손자가 연필로 썼다.

그리고 카드에 작은 쪽지 하나가 더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큰 고모님 혹 할머니 사진 모셔둔 방에 우리들의 인사 카드 없으면 할머니께서 조금 쓸쓸해하실 것 같아서요. 할머니 사진 앞에 놓아주세요.

 

조카 승원’

 

할머니 영전에 보내는 카드를 읽던 우리 딸들은 그만 조카의 마음에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우리 마음속에는 아직도 어머니가 살아 계시지만 다른 가족들도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어머니와 함께 잠자리에 들고 함께 잠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라 새삼스런 것이 아닌데 손자, 증손자까지 할머니를 마음속에 모시고 기억하고 살고 있다고 하니 진정 어머니는 우리 곁에 계신 것 같았다.

어머니는 비록 내 곁에 계시지 않지만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지금도 나의 유일한 상담자가 되어주시고 언제나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신다. 나처럼 우리 형제들도 모두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 통장에 명예만 바꿔놓고 그 통장에 용돈을 넣어 드린다.  

금년에도 살아계실 때처럼 새해 첫날에 어머니 영정 앞에서 세배를 올리고, 살아계실 때처럼 세뱃돈을 봉투에 넣어 드렸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그렇게 드리는 돈을 가지고 일가친척들이 세배를 오면 그 돈으로 세뱃돈을 주시며 즐거워하셨다. 금년에는 큰언니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우리들에게 세뱃돈이라며 어머니 세뱃돈 봉투에서 만원씩 세뱃돈을 주었다. 우리는 그 돈을 지갑 속에 넣고 일 년을 다닌다. 세배 오는 사람들에게 세뱃돈을 주고, 성당에 후원금도 내고 일가친척이 다녀가면 차비도 주고 학용품도 사준다. 가끔 당신 용돈으로 우리들은 회식도 한다.   

이번에 어머니는 연하장을 보낸 손자 가족에게 뮤지컬 ‘라이온 킹’의 관람권을 예매해서 선물로 주셨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분명히 그리 하셨을 거라며 우리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의견을 모으고 모두를 기뻐하였다.

정월 초하룻날 차례를 지내러 남동생 집에 갔을 때에도 현준이는 어디서 찾았는지 증조할머니 사진을 들고 나와 차례 상 앞에 놓는 것이라며 부산하게 오갔다. 제법 어른스런 모습으로 잔을 올리는 것을 돕고, 절을 하고, 어른들 틈에 끼어 의젓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물론 동생 현민이도 형을 흉내 내며 뒤뚱거리며 따라다닌다. 어른들과 함께 하는 재미있는 놀이로 참여하지만 그런 가운데 할머니를 기억해가는 것이 집안에 대통을 이어가는 자손의 모습이기도 한 것 같아 보기 좋았다.  

우리 어머니는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두셨다. 그 외아들의 외아들이 내 조카 승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한 집에서 생활한 시간은 갖지 못했다. 청년기에는 외국에서 공부를 하느라 가족을 떠나 있기도 했다. 그래서 할머니와 고모들과 살뜰한 정을 나눌 시간도 갖지 못했지만 할머니가 자기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하셨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입관을 할 때에도 우리는 어머니와 마지막 작별인사를 엎드려 어머니 이마에 손을 얹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승원이는 무릎을 꿇고 앉아 할머니 얼굴에 오래도록 입을 맞추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슬픔에 겨운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든든한 장손다운 모습으로 기억된다.       

할머니에게 올리는 연하장은, 어쩌면 할머니를 여의고 쓸쓸한 새해를 맞을 고모들을 위로하려는 조카의 배려인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사랑했던 가족 모두를 장손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한국 전통에 젖은 보수적인 가족제도를 생활해 나가려는 그로해서 천국에 계신 어머니와 우리는 더없이 가깝고 행복한 일 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어머니도 그럴 거라며 미소를 지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