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고삐

 

 

                                                                                          유혜자

눈 덮인 능선 위의 햇살마저 거두어간 겨울의 끝자락, 집으로 돌아오는 우리들의 볼은 발갛게 얼어 있었다. 방학 때나 만나는 사촌들은 낮 동안 지치게 놀고도 밤이면 화롯가에 둘러앉았다. 달빛이 하얀 영창도 방장으로 가려버린 아랫목에서 뜨겁고 신기한 얘기 내기를 하다가 화로는 윗목으로 밀쳐버리고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윗목의 질화로 불이 사위어 가는 동안 아랫목에서 아이들의 겨울잠은 달기만 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깨위로 으스스 느껴지는 한기에 잠이 깼을 때의 고요함. 간밤에 이불도 못 펴고 잠들었는데 어른들이 제대로 눕혀주셨고, 방바닥은 어느새 식어버렸다. 이불을 머리위로 뒤집어쓰려는데 솨르르 들려오는 바람소리. 대숲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간밤에 사르륵 내려서 청대 위에 얹힌 눈도 털어 가겠구나 하고 아쉬웠었다.

도대체 바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간밤에 나눈 얘기 속의 바다까지도 가는 걸까. 옛날 당나라로 가던 신라 사람들이 심한 풍랑으로 어느 섬에 닿아 바람이 멈추기를 빌던 중, 우두머리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활 잘 쏘는 이를 두고 가면 바람을 재워준다고 했다. 섬에 남은 활 잘 쏘는 이에게 노인이 나타나 자기는 용왕인데 왕족을 해치려는 늙은 중을 죽여주면 예쁜 딸과 고향에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했다. 청년이 호숫가에 나타난 늙은 중을 화살로 맞히는 순간 여우로 변해 쓰러지고 노인은 연꽃 한 송이를 주며 품고 가서 고향에서 꺼내보라는 것이었다.

바람을 잠재우고 공주를 연꽃으로 변형시키는 노인의 재주가 신기했고, 낮에 본 헛간 둥우리의 알을 품고 있는 암탉이 그 단단한 알을 어떤 힘으로 병아리가 되게 할까. 노인의 초월적인 힘과 알이 병아리가 되게 하는 신비의 정체를 생각하노라 잠이 달아나 버렸다. 곤히 자는 사촌들의 숨소리만 들리는 귓가에 마당 저쪽 끝에서부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 발자국 소리뿐만 아니라 마당으로 무언가 끌리는 소리도 함께였다. 우리 방 가까이 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 바닥에 요란스럽게 내려놓는 것이었다. 도둑일까? 무서워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이동할 셈도 아닌 모양이었다.

꼼짝없이 방문 쪽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오금이 저려왔다. 옆자리의 사촌을 깨워보려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윽고 밖에서는 탁탁 나뭇가지 부러뜨리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다가 조용해지더니 순간 문틈으로 연기가 스며드는 것 같았다. 아, 솔가지 타는 소리와 매캐하게 스며오는 송진 냄새. 누군가 군불을 지펴주고 있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궁금하던 중 목청을 뽑아 힘 있게 울어대는 장닭의 소리가 상쾌했지만 등이 훈훈해져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창살로 폴폴 몰려오던 새소리에 눈을 떠보니 바깥은 부옇게 밝아오고 마당 안은 술렁거렸다.

어린 날의 정경은 한적한 시골이거나 번잡한 도회이거나 꿈길처럼 아늑한 것으로만 여겨지는 것은 나만의 편견일까. 몹시 추웠던 벌판에서 높이높이 연을 올리던 이웃집 오빠가 무척 부러웠고 팽이치기를 잘해서 차례차례로 상대를 물리치고 뽐내던 식이의 기세는 얼마나 등등했던가.

논두렁 한쪽에 남은 빙판에서 미끄럼을 타며 건너편에서 띄워 올리는 높은 연에 감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겨우내 봉해두었던 할아버지 방의 분합문이 열려 있고 묵향이 풍겨 나왔다.

어느새 입춘대길, 건양다경의 글씨를 써놓으시고 우리에게 써보게 하셨다.

입춘이 며칠 남았으니 글씨를 연습해 써서 입춘 날에 어린이의 글씨를 기둥에 붙이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동이 불편한 노환으로 겨울을 무사히 나고 또 한번 봄을 맞는 감회였는지. 아니면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할 지라도 가족과 후손, 그리고 겨레와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염원하셨는지 모른다.

기둥과 대문에는 귀신 쫓고, 밝은 일, 경사로운 일을 불러 모으는 글씨로 축원하면서 기다리던 봄, 밤새 물레 잣기와 길쌈으로 긴 밤을 밝히는 안방, 새끼 꼬기와 가마니 짜기로 바깥의 찬바람쯤은 아랑곳하지 않던 농촌 사람의 근면과 성실이 가득했던 사랑방, 그것은 귀한 농촌의 역사였다.

그야말로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흙에서 초가에서 이뤄지던 날들. 바람은 청대 위에 얹힌 눈도 나무도 우리가 소유할 수 없게 하고 계절조차 우리 것으로 삼는 것을 거부했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구멍을 뚫어 놓고 시리고 아픔도 늘어나게 하는 바람. 그러나 계절이 지나면 변화된 산자락에서 들판에서 요술을 부리는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경이롭게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람은 어느 누구의 고삐에 의해서 조절되는 것일까.

바람으로 식어버린 꼬마손님들의 방에 이웃집 아저씨가 살짝 와서 군불을 지피게 한 것은 어느 바람의 조종이었을까. 무심코 새벽에 눈뜨면 지상의 숨소리에 그리움을 풀어놓고 달아나는 것도 바람인 것을.

우리에게 계절 속에 잠깐 머무를 것만을 허락해주는 바람. 이제 다가올 계절에는 바스락거리는 봄의 미세한 동작도 놓치지 않도록 계절의 고삐를 늦춰줄 수는 없을까. 달리는 바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