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한 짝

 

 

                                                                                       최숙희

송정리 앞 마을 논 두렁에 여자구두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맨 처음 구두를 발견한 사람은 이른 아침 논을 둘러보러 나온 이 마을 노인이었는데 이 일은 곧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이 삐딱구두 (하이힐)의 주인이 누구인가로 온 동네가 술렁였다.  사람들의 추측으로는,  지난 밤 누군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십리 밖 읍내로 나들이할 때 싸 들고가던 옷보따리에서 떨어진 것이며, 그 구두를 신을 만한 처녀로서 지난 해 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초등학교 적 내 친구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송정리 동네에서 그런 신식 구두를 신을 만한 처녀아이의 나이와 평소의 활달한 성품, 구두를 살 만한 살림 형편 등이 그애를 구두 주인으로 지목하게 된 것이다.   이 소문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내게까지 들렸을 즈음, 그 아이는 이미 ‘못쓰게 된 애’로 단정되어 있었다.  동네사람들의 심증일 뿐 혹 그애가 구두 주인이 아니라면 억울하기 이를데 없는,  사십여년 전 그 시대 처녀로서는 치명적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혼자 네 딸을 반듯하게 키워야하는 나의 어머니는 이런 이야기일수록 쉬쉬하기 보다 다른 집 아이들의 잘잘못을 우리와 함께 얘기하여 교훈으로 삼고자 하였다.  꼭 어머니의 교육 때문이라기 보다 우리는  홀어머니 딸이라는 소리를 듣지않겠다는 자존심때문에서라도 남녀 학생들이 어울려하는 써클활동이나 그당시 흔하던 빵집 출입을 한다거나 하며 시간보내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간혹 우리집을 방문한 고향사람들은  ‘서울 가시내’들이라는 말을 들먹이곤 하였는데,  ‘서울 가시내’란 말에는 그때까지 시골사람들이 믿고있던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에 역행하는 아이들이란 뜻은 물론,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못된 여자아이들이란 뜻도 담고 있어서 우리들 모두 ‘서울 가시내’로 매도된 듯하여  유쾌하지 않던 기억이다.  그 구두 사건은 얌전해야하는 강아지가 부뚜막에 먼저 오르다 낭패를 당한 본보기 사건으로 내 고향 사람들 간에 오래도록 회자 (膾炙)되었다.  

그로부터 십년 쯤 후,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한 대학 캠퍼스 여자화장실에서 학생들이 써 놓은 낙서를 읽게 되었다.  열아홉 살이라고 밝힌 한 학생이 순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화장실 안 바로 눈 높이에서 시작한 낙서는 줄줄이 달린 댓글들과 함께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순결을 주장하는 의견이 나오자 나는 그곳이 화장실이라는 것도 잊고 꽤 오랜 시간을 걸려 그 낙서들을 읽었다. 대부분의 댓글은  여성만의 순결이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음에도  순결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견이 예상외로 여럿 눈에 띄었던 것이다.  화장실과 같은 밀폐된 공간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낙서에 거짓말을 쓰지않을 것이라는 내 생각이 맞다면, 순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몇 사람의 의견은 당시 성에 관하여 개방적인 것으로만 알고있던 미국이라는 나라여서 그랬던지 매우 놀라웠던 기억이다.

아들 딸이 성년이 되도록 기르는 동안 나는 표현만 달랐을 뿐 내 아이들과 함께  순결이나 자유연애에 관하여 여러차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또한, 딸 아이에겐 토마스 하아디의 소설 <테스>를 반드시 읽어야 할 책 목록에 넣고 결혼전 순결을 잃은 여성의 불행한 삶과 결국 형장의 연기로 사라지게 된 여주인공의 운명에 대해 얘기도 하였다. 독서량이 많은 딸 애는 <테스> 처럼 재미 없는 책을 엄마가 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꼽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2007년 새해 첫 주, 결혼 십여일 만에 이혼하게 된 한 연예인 부부 얘기가 일간지 인터넷 뉴스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드라마에서의 역할이지만 극 중 여자 연예인의 조신한 몸가짐과 말투, 부드럽고 따뜻한 눈길, 그리고 남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의 역할로 인하여 나는 혼기가 꽉 찬 아들을 둔 엄마로써 그 드라마를 볼 때 내 아들이 저런 참한 아이를 데려온다면 하는 상상으로 가슴 설레인 적도 있다.  하여, 그 뉴스를 접하고 적지않게 놀랐다.  내용인 즉, 혼수에 얽힌 사소한 말다툼이 폭력으로 발전되고 급기야  여자의 코뼈가 부러지고 이미 임신 십 오 주이던 태아까지 사망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연일 그에 관한 기사와  독자들의 의견을 챙겨 읽던 나는 한가지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대체로 남녀 어느 쪽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의  진실공방이나 임신한 아내를 폭행하여 유산에 까지 이르렀다는 등 가정폭력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 누구도 결혼 십여일 밖에 안된 신부가 이미 임신 사 개월인 상황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양쪽 모두 서른이라는 적지않은 나이와 연예인 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 하여도 기사를 쓴 사람들이나 그 기사에 의견을 단 일반 독자들에게 조차 결혼 십여일에 이미 임신 사 개월인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일까.  텔레비젼 뉴스에 나온 제법 나이든 어떤 여성지도자인듯 보이는 사람도 이 차제에 가정폭력을 근절해야한다는 주장만을 하였다.  남이야 언제 아이를 갖게되든 다른 사람이 말 할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일은 처음 부터 다른 사람들이 알 필요 조차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왕에 여러날 뉴스꺼리가 되고 또한 그 많은 독자들이 의견을 낼  사안이라면 가정폭력 근절 주장과 함께 혼전임신에 관한 의견도 나왔어야 옳을 것이다.  선진국 따라잡기에 혈안인 지금은 혼전임신 따윈 이제 거론 조차 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일이 되었는가.

   

구두 한 짝의 일화는 이미 사십년도 더 지난 일이거니와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구식 사람이기 때문이라하여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사람들은 언제나 말세 (末世)라고 하였으며 특히 남녀문제에 관한 한 늘 새로운 상황에 대한 말세론은 있어왔다.  그럼에도 말세를 한탄하던 지난날의 어른들은 젊은이의 행동을 결국은 이해하고 보듬어안으면서도 때론 준엄하게 꾸짖을 줄도 알았다.  새로운 것과 함께 오래된 생각을 내는 목소리도 함께 있어야  건강한 사회라고 믿는다.  이런 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일까.

 

 

<월간에세이>로 등단(92)

작품집:<夜來가 하는 말>외

부산수필문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