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흘릴 권리를 원합니다.

 

 

                                                                                          주연아

21세기에는 과학 공학의 발달로 인해 사회적 변화의 폭이 더욱 커질 모양이다. 화상 전화나 나르는 자동차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핏속을 헤엄쳐 다니며 바이러스를 박멸하는 로봇과, 발 모양에 맞춰 자동으로 변형되는 신발, 그리고 공기에서 마실 물을 만들어 내는 휴대용 농축기 등 우리가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보았던 일들이 이제 점점 현실로 다가 오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복제도 멀지 않아 충분히 가능한 현실이 될 것이다.

이러다가 우리는 잘못하면 200살을 넘어 살 수도 있고, 더더욱 잘못하면 드라큐라처럼 영원히 죽지 않는 형벌을 겪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듯 상상을 초월하는 과학 문명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다.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문명국인 미래국에서는 모든 인간이 배양 시험관에서 자유자재로 만들어진다. 그 곳에서는 소마라는 묘약이 배급되어, 이것을 삼키면 술과 종교의 효과를 얻고 우울증에서 해방된다. 사람들은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공유하고, 24시간 내내 행복할 수 있는 인간들로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불만이 뭔지도 모른 채 태평성대 속에서 살아간다. 한마디로 이 미래국은 편리한 문명의 노예로서 살아가는, 그러나 영혼을 저당잡힌 바보들의 낙원인 셈이다.

이 신세계에 어느 날 반유토피아를 상징하는 야만국인 구세계의 청년 존이 방문한다. 그는 촌스럽게도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 났으며, 행복과 고뇌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란 사실을 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를 잘 알고 있고, 비문명국에서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불편함도 좋아 한다. 야만인인 그와 문명국의 총통이 나누는 대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神)을 원합니다. 시(詩 )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善)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눈물을 원합니다.’ 이런 그에게 문명국의 총통은 싸늘하게 말한다. ‘그렇다면 자네는 불행해 질 권리를 원하고 있군 그래’

 총통이 보기엔 그저 불행해 질 권리를 요구하던 존은 결국엔 야만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살을 택하고 만다. 그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겉보기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프로그래밍된 행복,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겉보기에 다소 불완전하더라도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진정 원한 것은 쾌락이 아니라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랑이 아니었을까.

결국 이 소설 속의 미래국은 멋진 신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저주받은 지옥이다. 소설의 제목은 유토피아의 상징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반유토피아의 상징인 것이다.

기계문명의 극한적인 발달을 그리고, 동시에 인간이 그 과학의 노예로 전락하여 마침내 인간적인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하는 비극을 그린 이 소설 속 청년인 존에게서, 왜 나는 우리 문인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일까.

박제된 영혼이길 거부하고 동요하는 영혼이길 원하고, 안락을 누릴 권리보다는 눈물을 흘릴 권리를 요구하는 존은 죽음으로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우리는 좀 더 긍정적인 방법으로 자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미래가 불확실하고 모든 것이 불연속선상에 놓여진, 이 깊고 캄캄한 인생이라는 광맥 속에서, 문학이라는 빛나는 원석을 찾아내어, 사람들에게 소중한 희망을 선사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이며 우리 문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아닐까.

희망,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신이 계시다는 명확한 징표가 될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