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소리

 

 

                                                                                       정태헌

댕그랑~댕그랑~ 댕그르르~ 댕~가~앙~.

현관문을 열자 울어 내는 풍경의 세미한 음이다. 명징한 소리가 울림으로 파고 든다. 걸음을 멈추고 그 음향에 빠져 든다.

강 건너에서 들려오는 갓맑은 음향이다. 산록을 거스르는 솔바람 소리가 섞여 있다. 그 소리 갈피엔 비취색 하늘이 떠간다. 하마 산바람이 키워낸 소소한 소리일 터, 가슴은 아득하고 소쇄해진다.

며칠 전부터 아파트 현관문 안쪽에 워낭만한 풍경 하나 매달려 있다. 번다한 도심에서 듣는 풍경소리가 이리 상쾌할 줄이야. 아내가 절집 구경을 갔다가 풍경 하나를 데불고 왔다.

고개를 들어 쳐다본다. 쇠종 안에 방울 추를 달아놓았는데 추의 흔들림에 따라 그 소리를 우려낸다. 추 밑에는 붕어 모양의 쇳조각이 공기의 진동에 흔들린다. 절집 대웅전 추녀 끝에 매달린 여느 풍령(風鈴)과 똑같다.

어느 산사 대웅전 처마 끝에 파랗게 녹슨 풍경이 창연히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끌린 적이 있었다. 그런 풍경을 동행한 사람에게는 사 건네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간직할 줄을 몰랐다. 한데 아내의 손에 이끌려 내 집에 온 것이다.

아내도 이제 풍경 소리를 가슴에 담고 싶은 나이가 된 것일까. 아니면 일상에 얼크러진 가슴일랑 풍경 소리로 헹구어 내고 싶었을까. 어쩌면  세 아이들 모두 외지로 떠나보낸 후 적적한 마음자리에 소리 하나 키우려고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애완견 한 마리 사 키우자고 보챘는데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더니만. 그래, 차라리 풍경을 구해온 게 잘한 일이지 싶다. 생로병사에 얽혀 있는 강아지보다 한자락 바람만으로 영원을 사는 풍경 하나 키우는 게 더 나을 성싶기 때문이다.

문틈으로 새어든 가만한 바람에도 떨리듯 흔들리는 소리는 안방에서도 들을 수 있다. 옆집에서 문을 여닫는 진동에도 풍경은 홀로 은은히 운다. 잠결에도 아슴히 울려오는 미세한 음향에 깨어나는 때면 풍경 소리는 그날 만났던 비음(秘音)이 된다. 그럴 때면 마음은 어느새 산문을 지나 일주문을 건넌다.

아직도 귀에 살아 있는 풍경 소리가 있다. 몇 해 전 지친 영육을 이끌고 오른 절집이었다. 거대한 바위들이 서로 겹쳐 있는 사이사이 산죽들은 청정하게 서 있고 산 밑 저편엔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 남해 금산 보리암. 삭풍에 흔들려 다가온 풍경 소리는 얼크러진 가슴을 풀어지게 했다. 그 소리는 세진(世塵)에서 느끼지 못한 청아한 메아리였으며 영혼의 오르가즘을 불러일으키는 관능의 소리였다. 솔바람에 흔들려 난향처럼 그윽했으며 썰물 소리에 흔들려 자비로움을 풀어놓았다. 방일이나 나태함을 깨우쳐 주는 경세(警世)의 소리였다. 풀의 나부낌에도 도랑의 여울에도 음이 있는데 탈속의 언어인 풍경임에랴.

풍경 소리는 영혼을 자극하는 음이다. 탐욕과 집착, 교만에서 벗어나게 하는 청량의 음이다. 배덕을 곁들이지 않은 유일한 관능이며 계시가 높은 지혜의 음이다. 풍경이 이처럼 청아한 음향을 지닐 수 있는 것은 맑은 공기와 햇빛, 고요와 침잠에서 비롯된 것일 터. 어찌 닮을 수 있을까마는 다만 곁에서라도 그 소릴 듣고 싶을 따름이다.

풍경은 문을 여닫을 때만 나는 게 아니라 살아 스스로 우는 듯하다. 삼경, 바람한 점 없는데 문을 여닫지도 않았는데 혼자 운다. 다른 곳에서 나는 소리일까 하고 귀 기울여 보았지만 그도 아니다. 풍경 소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울림이다. 떨림이다. 떨림을 잃고 사는 일은 생명이 소진되고 있다는 증거다. 어찌하면 저 풍경 소리를 가슴 속에 담아 둘 수가 있을까. 풍경 소리로 가슴을 채운다면 각다분하고 그악한 세파 속에서도 울림이 있는 명징한 가슴으로 살아 갈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바깥 세계와 안의 세계, 두 갈래의 경계에서 살아간다. 강건하고 당당하게 바깥세상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 안의 세계를 튼실하게 가꾸어야 되리라. 산사에서 듣던 풍경 소리가 시방 곁에 살아 있다. 바람결이 닿기 전에 스스로 울어 대웅전 추녀를 떠받치는 풍경처럼, 내 가슴에도 스스로 우는 풍경 하나 있으면 좋겠다. 하면 세사(世事)에 자꾸 무너지려는 허약한 가슴 떠받치는 지렛대가 되련만.

 

 

‘월간문학’ 으로 등단. ‘수필세계’ 편집위원

대표에세이문학상 수상

저서: ‘동행’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