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봉선화를 생각하며

 

 

                                                                                          이태동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과거를 되돌아보며 소멸된 현상에 대해 적지 않은 좌절감을 느낀다. 향수鄕愁란 것도 이러한 감정에서 연유해 온 것이리라. 나 역시 비 오는 늦은 여름 밤, 조용한 시간이 찾아오면, 지금은 사라져버린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 땅의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 먼 기억을 더듬을 때가 많다.

계절마다 비 오는 날의 독특한 정취야 있겠지만, 내가 추방된 고향 마을의 장마철 풍경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여름 소나기가 지나가면, 구름이 산 아래까지 내려왔다 올라가고 빗물을 머금고 분꽃과 함께 울밑에 서 있던 봉선화 모습이 무척이나 애처롭고 아리따웠다. 그때 봉선화는 사내아이들에게는 애인 같아 보였고 계집아이들에게는 손톱을 붉게 만드는 꽃 물감이었다.

그래서 전원을 처음 찾은 도시인이었던 이상李霜도 그의 “비망록을 꺼내어 머루빛 잉크로 산촌山村의 시정詩情을” 다음과 같이 쓰지 않았던가.

그저께新聞을찢어버린

때묻은흰나비

鳳仙花는아름다운愛人의귀처럼생기고

귀에보이는지난날의記事

봉선화는 이렇게 여름이 되면 장맛비 속에서 고향집 마당이나 울타리 곁에서 피는 꽃이었다. 그러나 봉선화는 분꽃이나 맨드라미같이 산촌에 사는 사람들이 바라다만 보는 꽃이 아니었다. 그 옛날 산촌에 사는 어여쁜 아가씨들은 봉선화를 따서 손톱에 붉은 꽃물을 들였다.

그 꽃으로 하얀 손가락을 아름답게 만들며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만들고 싶었던 숨은 욕망 때문이었던가. 지금 생각하면 봉선화는 그 옛날 시집간 여인들에게 고향집을 상징하는 꽃이었고 그리움의 대상對象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미美를 아끼고 사랑하며 시를 쓰다 지난해 작고한 김상옥은 봉선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들이던 그 날 생각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보듯 힘줄만이 서노나.

그러나 향기 짙은 찔레꽃 피는 봄날이 가고 이렇듯 봉선화가 피던 토착적인 여름 풍경은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농촌의 아가씨들이 고향을 등지고 사라짐에 따라 소멸되어 갔다. 도시로 몰려 온 그들은 봉선화 꽃물로 그들의 손톱을 아름답게 만들던 전설을 모두 다 잃어버리고, 매니큐어로 손톱을 붉게 칠을 하고 있다. 여인이 손톱에 매니큐어를 붉게 바른 손을 내미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보기가 무섭고 혐오스럽다.

편리하고 화려한 근대화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얼이 담겨있는 봉선화와 같은 꽃마저 소멸되어 망각의 바다에 던져지게 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소담한 장독간도 없고 봉선화마저 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내 작은 뜨락에 베추니아와 샐비어만 잔득 심어 놓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아무런 전설도 없는 일년초로만 뜰을 가꾼다면, 멀리 고향을 떠나 있는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처량’한 여름 꽃, 봉선화의 아름다운 모습마저 지워져 버릴 것이 아닌가.

금년에는 딸아이라도 데리고 구름이 산 아래까지 내려오고 강물이 흐르는 고향으로 가서 여름을 보내며 손톱을 봉선화 꽃잎으로 물들이게 했으면 한다. 그렇게 하면 그가 더 나이 들어서 손가락의 힘줄이 굳어지게 되더라도, 손톱에 묻어 있던 봉선화의 꽃물이 그의 마음에도 묻어 고향을 잊지 못하리라.

나와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내며 여름 비 오는 날 툇마루에서 손톱에 꽃물들이던 누님은 세월 따라 늙어 가지만, 나는 빗물이 떨어지던 기와집 처마 아래서 그 슬픈 소프라노 목소리로 노래 불렀던 ‘봉선화’를 쉽게 지워버리거나 잊을 수 없다. 조용히 비가 내리는 여름 밤 내가 장의자에 누우면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봉선화 모습이 물위에 비친 얼굴처럼 내 ‘마음의 눈’에 선명한 이미지가 되어 흐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