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이

 

 

                                                                                    김형진

발코니에 나갈 때마다 구석에 놓인 다듬잇돌에 눈길이 간다. 까만 색 다듬잇돌은 모서리가 깨져 볼품을 잃었다. 고향 집에서 광주로 이사할 적에는 방망이 한 벌과 짝이 맞았는데, 이번에 전주로 이사할 때 보니 방망이는 찾을 수 없어 돌만 가지고 왔다. 그 후 발코니에 나갈 때마다 다듬잇돌에 눈길을 주는 게 버릇이 되었다. 어떤 때는 한참 동안 내려다보며 서 있기도 한다.

한껏 높아진 하늘에 은하수가 옅어져 갈 무렵, 달은 사립문 옆 개가죽나무 꼭대기에서 묵묵하다. 마당에는 지붕보다 높은 볏가리가 달빛 속에 다소곳하고 초가지붕 위에는 늙은 박이 하얗게 엎디어 있다. 호롱불빛 머금어 은은한 창호지에 어린 그림자는 신명 들린 춤사위로 자지러진다.

단정한 낭자머리와 길게 땋아 늘인 댕기머리가 마주 앉아 고갯짓을 주고받으며 방망이를 휘두른다. 높아졌다 낮아지고 낮아졌다 높아지는 방망이질하는 팔놀림이 북채 휘두르는 무희의 손놀림보다 매끄럽다. 연출자도 없이 눈빛과 고갯짓만으로 강약과 장단을 맞추어 내는 춤. 거친 나무에 목공의 심성을 불어넣어 부드러운 곡선으로 깎아 다듬은 방망이로, 투박한 돌덩이에 석공의 혼을 불어넣어 반들반들 평행으로 밀어 다듬은 돌. 그 위에 몇 날 며칠 마전한 옷감을 놓고, 두 사람이 마주앉아 내치는 다듬이질은 서양의 드럼과도 동양의 난타와도 다른 생활 속에서 터득한 예술이다.

두 사람의 팔놀림이 자칫 균형을 잃어 방망이가 엉키지 않게 하기 위해 찰나의 착오도 없이 빈자리를 겨냥하여 들락거리는 방망이의 민첩함과 옷감에 닿은 방망이가 자칫 각도를 잃어 돌이 맞지 않게 하기 위해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수평을 유지하는 방망이의 조절능력은 각본대로 연습해서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균형과 조절 능력이 몸에 밴 사람들만이 몸소 연출할 수 있는 예술이다.

다듬이에는 혼을 끌어안는 리듬이 있다. 방망이로 돌을 내려칠 때 생기는 메마른 소리도 옷감을 방망이로 내려칠 때 나는 푸석한 소리도 아닌, 돌과 옷감과 방망이가 서로 어울려 빚어낸 소리다.

그 소리는 밝은 날에 귀로 듣는 것보다 달밤에 가슴으로 들을 때 더욱 울림이 크다. 귀로 듣는 음정과 박자는 단조롭지만 가슴으로 듣는 음정과 박자는 변화가 무상하여 오장을 움켜 흔드는 힘이 있다.

달빛 무르익은 가을 밤. 안방을 가득 채우고 넘쳐 장지문 틈으로 빠져나온 다듬이 소리는 마루 천장 서까래 사이를 타고 흘러 처마 밑에 고였다가 거기서도 또 넘쳐 허공으로 흐른다.

허공에서 흐르는 이 소리는 앞뒤 집 안방 문틈으로 타고 들어 바느질하는 아낙의 가슴을 울리기도 하고, 옆 집 머슴방으로 들어가 더벅머리 총각의 가슴을 헤집어 놓기도 한다. 바느질하는 아낙의 손놀림에는 절로 가락이 붙지만 홀로 앉아 달빛 어린 창호지에 정신을 앗기고 있던 더벅머리총각은 슬며시 지게문을 민다.  

달빛 호수에 몸을 담근 듯 삽상颯爽한 기운이 얼굴을 감싼다. 비로소 다듬이 소리가 가슴에 파문을 그리기 시작한다. 소리는 겹겹으로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온 동네를 가득 채운 소리는 동네 앞 당산나무를 타고 하늘로 향한다. 내일 모레면 만월이 될 달은 중천에서 묵묵하다.

충만한 은총을 쏟아 내려 온 세상을 정화淨化하는 고된 작업에 지쳐 졸고 있는 듯, 엷은 구름 속에서 시무룩하다. 다듬이 소리는 졸고 있던 달의 정령을 깨워 빙긋이 미소 짓게 한 듯 달이 구름 밖에 나와 밝은 빛을 뿜는다. 사뭇 신명이 들려 으쓱으쓱 어깨춤을 추는 듯도 싶다.

가족들의 추석빔 마련에 정성들이는 여인네의 마음이 정교한 팔놀림을 이루고 이 팔놀림이 신비로운 박자와 음정을 생성하여 사람들의 가슴에 파문을 이룬다. 그 파문이 온 동네를 휘돌아 공중으로 치솟아선 달의 정령을 깨우는 다듬이의 예술. 그 예술이 지금은 아파트 발코니 구석에 놓인 다듬잇돌과 함께 퇴폐해 버렸다.

그늘처럼 으슥한 돌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자니 오목가슴이 시려 온다. 옆 산엔 올해도 어김없이 신록이 짙어 가는데 다듬잇돌에 엉켜 말라붙은 그 신명은 영영 소생의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