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으로 내다본 풍경

 

 

                                                                                    허창옥

자동차가 긴 마찰음을 낸다. 이따금 듣는 소리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창 밖을 내다본다. 별일 없는가 보다. 자동차들은 쌩쌩 달리고 인도에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천천히 또는 바쁘게 걸어가고 있다. 느티나무 가로수들은 제자리에 굳건하게 서 있다. 북쪽 창으로 내다보는 풍경이다.

집의 남쪽에도 창이 나 있다. 그쪽 풍경은 좀 더 정적이고 서정적이다. 아파트의 공동정원인데 늘 조용하다. 나무들이 서 있고 산책로도 있으며 원두막만 한 쉼터도 있다. 그 너머는 숲이다. 나는 남쪽 창으로 밖을 내다보기를 좋아한다. 그러니까 나는 북쪽 창으로 역동적인 삶의 현장을 내다보고, 그 삶에서 고단해진 마음을 남쪽 창을 내다보며 쉬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창들은 그렇듯 풍경을 담아낸다.

지난 일요일 팔공산엘 가다가 어느 길목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큼지막한 바윗돌이 하도 많아서 보고 가자는 것이었는데, 그 옆에 있는 묘지를 먼저 둘러보게 되었다. 키 큰 소나무로 둘러싸인 묘지는 조용했다. 한눈에도 오래된 묘지임을 알 수 있었다. 비단실처럼 가는 풀이 오륙십 센티미터 정도로 웃자라서 넓은 묘지를 고르게 뒤덮고 있었다. 신비하였다.

한 기의 무덤이 위쪽에 있었고 조금 떨어져서 아래로 또 몇 기의 무덤이 있었다. 나는 묘지 주변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영혼이 떠난 육신의 집, 흙으로 돌아간 지 오래되었을 망자의 집 앞에서 나는 조금의 거리감도 두려움도 느낄 수 없었다. 묘비를 읽었다. 府事金海金公之墓, 貞夫人綾州朱氏祔左, 부부의 합장묘였다. 오래된 유택이 주는 느낌은 허무함도 쓸쓸함도 아닌 평화였다.

그러다가 돌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도로 쪽으로 세워놓은 빗돌에 새겨진 시를 읽으며 걸었다. 고은의 「시인」, 신경림의 「갈대」,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를 읽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돌 그리고…” 라는 테마공원이었다. 가운데에 가지를 희한하게 뻗은 배롱나무 고목이 서 있고 그 둘레를 패랭이꽃이 에워싸고 있었다. 스피커에서는 조영남의 「그대 그리고 나」가 낮게 흘렀다.

수천 점의 크고 작은 돌들을 느릿느릿 구경하다가 정원용 테이블에 앉아 있는 수염이 텁수룩한 중년남자를 보았다. 묘지를 덮고 있는 풀의 이름을 아느냐고 내가 물어보았다. 그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오후 세 시의 햇살 아래 금빛으로 일렁이는 풀들을 바라보며 참 보기 좋다고 내가 또 말했다. “후손이 왔을 때 내가 벌초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가 말했다.

그래서 그가 그 공원의 주인인 줄 알았다. 크고 작은 돌들을 보고 경탄하는 나에게 그는 혼자가 아니면 집을 구경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수석을 좋아하는 남편이 저쪽에서 관상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남편을 불렀다. 밖에서는 무슨 창고같이 단조로운 느낌의 단층집으로 보였으나 계단을 내려가서 보니 이층집이었다. 벽이 투박하고 높아서 의아했는데 집주인이 “죄인이라서 감옥에서 산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아주 그럴듯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여염집이 아니란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디오장치와 피아노가 있는 무대,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긴 회의용 탁자, 많은 음반과 책들, 다 열거해서 무엇하랴. 아래층은 작은 음악회 같은 ‘모임’을 위해 마련했다고 하였다.

아래층에서 밖을 내다보니 그의 말대로 감옥처럼 벽만 보였다. 그가 이층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거기서 벽은 물론 구석구석에 나 있는 여러 개의 창문들을 보았다. 아니 창문들이 아니라 창문에 들어와 있는 풍경들을 보았다고 해야 맞겠다. 창 하나하나가 산수화나 풍경화를 담은 그림액자라고 그가 말했다. 정사각형, 직사각형, 옆으로 긴 것, 위아래로 긴 것, 창문들에는 그의 말처럼 저마다 다른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먼 산 능선, 가까운 나무숲, 돌무더기들…….

정원의 돌에 새겨진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를 보았을 때 그가 가톨릭신자라는 걸 알았다. 부부가 거처하는 이층에는 군데군데 십자가상, 성모상들이 있었다. 묵상을 위해 마련된 작은 방에 들어섰다. 나는 잠시 천국을 본 것 같았다. 낮은 탁자 한 개와 방석이 좌우로 긴 창을 향해 놓여 있었다. 조금 전의 그 묘지가 바로 눈앞에 보였다. 비단실 같은 풀들이 미풍에 하늘하늘 물결지고 있었다.

차안과 피안이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함께 있다. 어느 고요한 시간에 누군가가 홀로 앉아서 묵상에 잠긴다. 적념. 그런 영상을 떠올려보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창으로 묘지를 바라보며 묵상을 하면 죽음이 그리 낯설거나 두렵지 않을 것 같고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집 창문으로 내가 내다본 풍경은 여럿이었으나 오직 묘지 풍경만이 뇌리에 남았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란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영영 내 것이 아닐 것 같다. 마냥 살 것 같다. 그러한 의식 또는 무의식이 나로 하여금 죽음에 대한 묵상을 회피하게 하고, 나아가서는 삶에 대한 성찰마저도 가벼이 하게 했을 터이다. 삶은 그 유한성 때문에 존귀한 것이고 죽음은 반드시 오는 것이기에 또한 숭고한 것임을 그 창문을 내다보며 새삼 깨닫게 되었다.

글을 쓰는 동안 북쪽 창에 햇살이 비낀다. 다시 창가에 선다. 길에는 여전히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다니고 건너편 아파트 너머로 멀리 팔공산의 긴 능선이 또렷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