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래나무

 

 

                                                                                      심규호

가래나무가 어떤 효용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저 시골 할아버지 댁 앞 길가에 어느 날 문득 존재 확인이 된 그 나무는 뒤로 문전옥답을, 앞으로 문간에 붙은 사랑방을 빼고 기억자 형태로 된 셋째 댁을 굽어보고 그저 그렇게 서 있었다. 셋째 댁이라 함은 할아버지가 9 형제분 가운데 셋째였기 때문인데, 첫째나 둘째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내겐 별다른 기억이 없다. 그저 사냥 좋아하시고, 체격이 우람하셨다는 어른들의 회고담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 나무에게 열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을이면 푸른 열매가 다닥다닥 열리는데, 돌팔매질로 툭툭 떨어진 열매를 두 눈 반짝이며 까보면 살은 없고 복숭아 씨앗 두세 배쯤 되는 뼈다귀가 드러났다. 실망, 혹 어쩔지 몰라 돌멩이로 복숭아 씨앗 같은 놈을 갈라 보면 아주 조금 허여멀건 살이 드러났다. 또 실망. 그래도 한번 먹어볼 요량으로 애써 구한 옷핀으로 가시 많은 고기 살 발라 먹듯 하니, 맛은 호도 맛이로되 아쉽게도 주전부리를 충족시킬 만한 양이 되질 못했다. 이후로 가래나무는 나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니 나는 그 나무가 언제 심어졌는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다. 내 어렸을 때는 신작로 따라 양 옆으로 나열해 있는 포플러 나무나 동산에 지천인 밤나무, 울타리에 늘어진 대추나무나 보일까, 열매도 별로고 그렇다고 그럴싸한 그늘을 마련해주는 것도 아닌 길가 삐쭉하게 키만 큰 그 나무가 관심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린 내 눈에는 거대한 꽃상여가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머리에 허연 띠를 둘러맨 상여꾼들이 선소리꾼의 앞소리에 따라 후렴을 매겼다. 시끌벅적한 구경꾼들, 시장을 돌아 해방촌의 퍽퍽하게 마른 길을 거치고 다리를 건넌 상여는, 언제부터인가 동성同姓이 된 어린 고조, 증조 할배며 할매가 모여살고 있는 소야 마을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 다음 상여가 어떻게 산으로 올라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때 나는 동네 아이들하고 산막 넘어 군부대 야산에 방치된 망가진 탱크 속에서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놀다가 목이 마른 우리들은 샘물가로 뛰어갔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큰 다래에 풀어 놓은 붉고 노란 물―아마 가루 주스였을 것이다―에 잔뜩 배부른 우리들은 어느새 서산을 넘어가는 햇살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마다 큰아버지는 상식上食을 올리고 호곡을 하셨다. “아이고, 아이고.” 우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소리는 언제나 슬펐다. 비록 아직 어린 나에겐 지겨움의 의식일 따름이었지만. 그리고 또다시 소리 없이 세월이 흘렀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반쯤 다니다 중퇴했고, 사촌 형들은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장가를 들었다. 손자, 손녀들의 학력이 높아감에 비례해서 할아버지의 땅은 무더기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밟으신 땅은 죄다 할아버지의 땅이었다고. 그래 우리는 땅 부자였던 것 같다. 여드름이 한창일 적에 아버지와 해방촌에 있는 우리 땅을 잰 적이 있었다.

거의 대부분 집주인들은 자신들의 땅이 누구 것인지도 모르고 있었고, 나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후 아버지는 할아버지 산소 앞의 너른 산비탈에서 과수원을 하셨는데, 아마도 해방촌의 땅을 잰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지주의 막내아들이었다. 어린 묘목들이 한창일 때, 아버지는 아예 과수원 아래에 집을 짓고 그 곳에서 사셨다. 과외로 양계도 했다. 그것은 계속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어느 날 돈과 함께 사료가 떨어지고 중닭들은 배가 고파 서로 엉덩이를 쪼아 먹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급기야 하루 너댓 놈씩이나 압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버지는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알을 낳게 될 중닭들은 싼 값에 처분하셨다. 그 때 아버지 얼굴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시골을 떠나 서울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수원이 남의 손에 넘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셋째 댁은 나날이 퍼렇게 멍이 들어갔다. 예전 할아버지가 거처하셨던 사랑방이며, 안방에서 대청마루를 지나 부엌이 따로 붙은 건넌방까지 죄다 타지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물론 지역의 특성상 군인 가족들이 많았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여전히 아웅다웅 짧게 그리고 자주 다투셨다. 문설주는 많이 닳았지만 대들보와 주춧돌은 여전히 굳건한데 집안은 점차 생경해지고 낯설어졌다. 가을날이면 대청마루 가득한 볏섬들이 사라진 지 오래되고 문전옥답에 누군가 집을 지었다. 예전에 새경을 주었던 이들의 집이라고 했다. 그 집 아들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가래나무가 나에게 다가왔다. 문전옥답과 셋째 댁 사이를 가로 막고 이미 우뚝 서 있는 가래나무 아래에 서 있는 나는 결혼을 하고 고만고만한 두 아이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가래나무의 열매는 여전히 파랗고 잔뜩 매달려 있었다. 예전처럼. 게다가 그 열매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다. 내 어릴 적 기억에 언제나 할아버지의 손에서 이리저리 굴려지던, 그리하여 반들반들 윤이 나던 그 열매, 그것이 바로 가래나무의 열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중국에 갔다가 그들이 사용하는 건신구健身球를 사온 것이 한 계기가 된 셈인데, 파랗고 벌건 무늬가 상감된 촌스러운 건신구를 보면서, 가래나무의 열매를 생각하게 된 것은 알 수 없는 잠재의식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때 나는 어떤 까닭에서 기인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가래나무가 밑동까지 뽑혀져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가래나무는 더 울창하게, 더 튼튼하게 그 때 그 곳에 씩씩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내 마음 속에 할아버지 나무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당신이 뿌리고 거둔 들판과 영원하게 썩지 않을 주춧돌과 우람한 대들보로 형식을 갖춘 당신의 집안을 넉넉하게 굽어 살피시면서, 웬만한 비바람이나 뙤약볕에도 끄떡없이 그저 건재함으로 질서를 이루시고 안녕을 구가하신 당신의 삶을 문득 기억하게 만든 가래나무는 바로 내 할배 나무였던 것이다.

 

 

<<계간수필>>로 등단(99년). 제주포럼 대표

제주산업정보대학 중어과 교수 겸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