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아카데미강좌 제15회 강좌요지>

 

노천명의 수필세계

 

 

                                                                                    고 임 순

1930년, 여성작가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시대에 모더니즘적 경향을 띤 시세계를 이룩했던 노천명은 ≪산딸기(1948)≫와 ≪나의 생활백서(1954)≫ 2권의 수필집을 들고 50년대 수필계를 불 밝힌 여성이다.

어둠과 회의와 고통으로 가득 찬 실존의 조건들 속에서 시에 쏟아 붓지 못한 가슴의 응어리를 알알이 풀어 엮어 짠 명주 같은 수필들. 노천명의 수필 연구는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복권과 조명이 될 것이다.

1. 고향의식, 모성으로의 회귀

노천명의 의식 속에서 어머니, 고향, 눈, 바다는 동의어로 연결되어 있다. 그 단어들의 상관관계에서 그의 수필작품의 소재는 이루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강력한 힘, 그 원동력은 무엇보다 작가의 내면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고향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뒤는 이 둘려 있고 앞엔 바다가 시원하게 내다 보였다. … 해변에는 갈밭이 있어 사람의 키보다 큰 갈대들이 우거지고… 산개나리를 한아름 꺾어 안고는 산마루에 올라서서 수평선에서 아물거리는 감빛 돛폭을 보며 훗날 크면 저 를 타고 대처(大處)로 공부를 간다고 작은 소녀는 이 많았다.

― <향토유정기>에서(밑줄은 인용자)

산, 바다, 해변, 갈밭, 수평선, 배, 꿈 등 유년시절의 체험 속의 풍물들을 환기시켜 놓은 것이 노천명 수필의 알맹이인 고향의식이다. 작가의 조용한 이미지에 비해서 고향으로 내닫는 의지는 매우 강하여 강력한 에너지로 분출됨으로써 표현의 효과는 파문처럼 번지는 여운을 준다. 어떤 작품에서든 고향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신명나게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작가가 고향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구상화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무의식적으로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향사랑의 저변에는 늘 어머니 사랑이 흐르고 있다. 홍역을 할 때 밤을 새시고(겨울밤 이야기), 바다처럼 어루만져 준 (송전초), 별처럼 먼 이야기를 들려준(여름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플라톤의 말처럼 원류에 대한 동경이다. 그것은 인간이 갖는 영원한 고향으로 귀의하려는 인간의 원천적 노력인 것이다.

이렇듯 그의 수필쓰기는 유년시절의 ‘나’를 현재에 불러들여 자기 자신을 재확인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또 뿌리인 어머니의 숨결이 있는 고향으로 다가감으로써 여성이라는 인간의 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글쓰기는 여자의 성을 찾아주는 정체성 확인의 작업인 것이다.

≪옥루몽≫을 읽는 어머니 목소리를 들으며 잠이 든(향토유정기) 노천명에게 어머니의 목소리는 삶을 위안하고 견디게 한 글쓰기의 밑거름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내재한 욕망에 귀 기울이고 어머니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면서 여성을 주제로 인식하는 사고를 정립해 나가고 있다.

“그 목소리는 어머니이며 어머니의 육체다. 목소리, 고갈되지 않는 젖, 그 어머니를 다시 찾아야 한다. 잃어버린 어머니, 영원성, 그 목소리는 젖과 함께 섞여 있다. … 글쓰는 여성은 따라서 엄청난 힘을 지닌다. 여성의 이 힘은 어머니로부터 직접적으로 이끌어낸 여성적인 힘이다.”

이 같은 식수스의 말처럼 노천명의 글쓰기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이끌어낸 여성적 힘으로 어머니와의 근본적인 유대를 서정적이고도 행복하게 환기시키는 작업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2. 전통지향적 표현과 언어의 액체이미지

2.1. 노천명은 이화전문학교에서 찰스 램의 강의를 듣고 <백년제가 돌아오는 시인 찰스 램>이란 논문을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1934). 그리고 시인이 되고 사회에 나와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글을 쓰는 근대여성이었다. 이러한 근대적 외양에 비해서 수필작품에서 드러나는 것은 농촌과 자연친화적 서정과 전통지향적 표현이다.

시골의 유년기에 대한 강한 집착이 근대성의 덜미를 잡고 있는 듯 사라져가는 풍속어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그는 전근대적인 순수한 전통언어를 발굴, 매개어로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치 원칙처럼 매개어를 시골 풍물로 하지 않으면 도시의 어떤 인물이나 현상도 표현할 수 없는 수사법을 쓰고 있다는 점이 바로 노천명 수필의 특성이다.

앞 벌 논가에선 개구리들이 소낙비처럼 울어대고 삼밭에선 오이냄새가 풍겨오는 저녁 마당 한 구퉁이에 범산넝쿨, 엉겅퀴, 다북쑥, 이런 것들이 생짜루 들어가 한데 섞여 타는 냄새란 제법 독기가 있는 거이다. … 달 아래 호박꽃같이 화안한 저녁이면 … 영악스런 모기들이 아리숭아리숭하는가 하면 … 여기는 바다 밑처럼 고요해진다.

― 「여름밤」에서(밑줄은 인용자)

농촌의 여름 밤 풍경이 손에 잡힐 듯 묘사된 소박하고 정감있는 윗글은 서두부터 전통적 매개어로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이외에도 “산나물 같은 사람(산나물), 신작로 망나니의 황소 같은 눈의 자동차(자동차), 도롱이를 입고 논에 들어간 모양들이 흡사 왜가리 떼들 같다(여중기), 댕기 같은 마늘잎사귀(낙엽)” 등, 노천명은 고향마을의 자연을 정감있게 그림으로써 자연친화적이며 전통지향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노천명의 수필은 우리 겨레의 호흡과 감정, 체취를 느끼게 하고 우리 전래의 생활과 여성이기에 이을 수 있었던 전통적 언어체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곧 우리 생활언어를 전통지향성의 한 미학으로 창조한 것이며(김승우) 한편으로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탐색한 것이라 하겠다.

2.2. 노천명 수필에 드러나는 또 다른 특성은 액체이미지의 언어들이다. 물처럼 녹아 흐르는 특성을 지니는 그녀의 글은 물컹하고 소녀적 감상적이라는 지적도 받은 바 있었지만 이 점이 또한 그의 독특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어둠 속에 핀 눈이 퍼뜩퍼뜩 유리창에 부딪치고는 녹아버린다(눈 오는 밤), 소리 없이 세우細雨가 땅을 축이는 저녁(어떤 친구에게), 바다물은 심청색 내 흰 치마자락을 담그기만 하면 곧 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바닷가를 찾아서), 집집의 뜰에 거리의 로터리에 이 신록물이 들게 하라(5월의 구상)

특히 <5월의 구상>에서 액체이미지는 푸른 빛과 결합하여 지친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을 나타낸다. ‘푸른 5월이 밀물처럼’ 밀려오면 도시엔 신록물이 들게 되고 ‘시민들의 충혈된 눈을 수정처럼 맑게’ 해줄 수 있으며 ‘복잡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곧 노천명에 있어 말의 생명은 눈처럼 녹아들고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눈에 비치는 모든 사물은 풀어져 녹아서 액체로 흐르면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의 풍경을 이룬다. 바다, 눈, 비, 물, 눈물, 밀물, 신록물, 치마를 적신 물 등 이렇게 노천명의 글에 나타난 액체이미지는 경직된 남성언어에 대응된 부드러운 여성언어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녀는 딱딱한 현실을 부드럽게 융화시키는 액체의 힘을 파악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노천명의 생애는 파란만장이었다. ‘마귀할멈 같은 6․25동란’을 겪고 짓밟히며 떠밀리며 참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남았다(산다는 일). 부산 피난생활을 판잣집에서 이겨내고 삶을 견디게 한 글쓰기로 불혹 고개의 위기를 넘겼다. 폐허가 된 서울에 올라온 노천명은 㰡”이화 70년사㰡• 집필을 마친 56년, 불면증과 생활고로 시달리다 심한 빈혈 증세로 쓰러져 이듬해 46세로 생을 마감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기자, 작가, 여성으로서 오로지 글쓰기에 한 몸을 바쳤던 노천명. 여성적 삶과 글쓰기로 일관된 인간의 존재탐구, 모성의 원초적 뿌리에 대한 향수와 열정, 그리고 사랑과 믿음, 그것들은 병약한 육체 속에 가리어져 있던 참 생명을 찾으려는 반증이었다. 그래서 여성으로서의 그의 수필쓰기는 아픔과 고통을 이겨낸 생존의 서사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