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천료]

 

동그라미

 

 

                                                                                      은서향

함께 걸어가던 딸아이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자동차에 부딪힌 것도 누가 와서 민 것도 아닌데 무너지듯 길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순간 아이가 입고 있는 까만색 옷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딸아이에겐 검은 옷이 없는데 어찌된 일일까 다리가 후들거렸다.

거리는 진공상태처럼 고요했고 주위에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이를 안아 올리니 입가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피를 보는 순간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나보다 덩치가 큰 아이를 들쳐 업고 뛰었다. 뛰면서도 있는 힘을 다해 딸애 이름을 불렀다.

내 목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꿈을 꾼 것이다. 식은땀이 흘렀다. 딸아이는 전날 홍천으로 M.T.를 떠나고 집에 없다. 가는 날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약속 시간까지 조금만 더 자겠다고 하던 일이 생각났다. 가지 말고 쉬었으면 싶었지만 며칠 동안 계획을 세우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말리지 못했다. 걱정이 된다. 한편으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까짓 꿈 때문에 이렇게 조바심인가 싶었지만, 그럴수록 꿈이 또렷이 떠올랐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눌렀다.

딸아이의 목소리는 들릴 듯 말듯했다. 친구들이 물놀이 나가고 없는 빈방에서 웅크리고 있다고 했다. 몸살인 줄 알고 약을 먹고 잤는데 지금은 배가 몹시 아프다고 했다. 다행히 방학이라 집에 있던 남편과 홍천으로 달려갔다.

딸아이는 오는 동안에도 아픈 위치나 증상이 달라졌다. 집 근처 병원에서는 장염인 것 같은데 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서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병원을 여러 군데 돌아다니다 결국 급성충수염이란 진단을 받았다. 마침 입원이 가능한 병원이 있어 바로 수술할 수 있었다. 수술을 끝낸 의사는 기다리고 있던 우리에게 잘라낸 충수돌기를 보여주었다. 새끼손가락만 한 충수돌기는 화농이 심하고 피가 선연했다. 꿈에서 피 흘리던 딸아이 모습이 떠올라 섬뜩했다.

꿈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친정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먼저 떠난 엄마 꿈을 꾸면 유독 마음을 쓰곤 하셨다. 가끔씩 잠에서 깨면 “오늘은 네 에미가 꿈에 보였으니 매사에 행동거지를 조심하라”고 하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조상의 현몽을 믿었던 것 같다.

아픈 엄마가 떠나던 날을 생각하며 혼자 간직한 느낌이 있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부산에는 눈 오는 날이 거의 없기 때문에 눈을 보고 즐거워진 나는 동무들과 신나게 놀았다. 노느라고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금방 어두워진 것 같았고 친구들이 하나둘씩 불려 들어가자 초조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날은 엄마 얼굴이 자꾸 떠올라 나도 모르게 병원으로 달려갔다. 낮부터 정신이 혼미했다는 엄마는 내가 들어서자 가만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또렷한 눈빛으로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었다. 격려와 당부, 미안함이 담겨진 그 눈빛. 엄마는 딸이 가질지도 모를 자책감을 덜어주려고, 그렇게 애절히 불렀던 것일까. 오랫동안 아프기만 하다가 일찍 떠난 엄마가 밉기도 했지만 마지막 눈빛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듯해진다. 그날 엄마는 내게 강한 주파수를 보내 나를 부른 것이리라. 꿈에서 딸아이의 절박한 상태를 감지해 낸 나의 무의식도 그런 것 아닐까 싶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그러하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신의 존재가 그러하듯, 부모자식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 서로의 간절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부모가 죄를 지으면 자손 삼대까지 갚아야 하고, 부모가 공덕을 쌓으면 후손 수천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말이 아니더라도, 부모와 자식을 이어 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 있음이 분명하다. 끊고 싶다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요, 버리고 싶다고 버려지는 것도 아닌, 사랑도 미움도 끼어들 수 없는 하늘이 내려 준 끈. 그 끈은 대대로 이어지다, 처음 시작한 곳과 만나면 커다란 동그라미가 되는 것 아닐까.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순환의 동그라미 속에 우리 모녀도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겠지. 오래 전부터 불어왔을 바람 한 자락이 엄마의 숨결처럼 볼을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