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천료]

 

창 문

 

 

                                                                                     오순자

한가할 때면 나는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창문에 그림을 바꾸어 끼운다. 삼층에 있는 내 방의 이백여 미터 앞에 산이 있어서 마음이 심란할 때 목가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건물 바로 앞에는 양옆에 나무와 꽃들이 심겨진 길이 있고, 그 아래에는 운동장이 있어서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진 다양한 조형이 가능해진다. 방에 걸린 액자에 갇혀 꼼짝도 못하는 그림에 비하면 창문에 그려지는 그림은 영화의 화면처럼 두 번도 같은 그림이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고민은 점점 더러워지고 있는 유리를 닦을 수 없게 만들어진 창문의 고정성에 있다. 두 쌍의 창문에서, 위 창문은 붙박이이고, 아래 창문은 밑에서 밖으로 밀어 열게 되었는데, 바람만 들락거리고, 손목이 들어가지 않게 조금밖에 열리지 않는다. 세월이 가면서 그림이 점점 더러워지고 있는데도 뾰족한 묘책이 없다. 누군가가 밖에서 창문을 닦아줄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 진저리가 쳐진다. 기다림이란 내 의지대로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무력감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러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 창문에 떠오르는 사물에게로. 그리고 호기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선택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지루함을 잊어야 한다.

저녁이 되면 나는 오히려 창문 속에 갇혔다 놓였다 하는 그림이 된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의 실루엣만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사람들은 마주대하고 10분만 지나도 그 사람의 과거의 경력이나 현재의 사회적인 위치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다. 그래서 호기심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이리 저리 돌려가며, 알아내고 싶은 것을 다 알아내고는 자신과 비교해 서열을 매긴다. 그리고는 다가가야 할 사람인지 회피해야 할 사람인지 결정한다. 많은 사람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내가 그들의 창문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들의 창문 속에 갇히는 그림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닫힌 공간에는 어디에나 창문이 있다. 기차나 버스를 탈 때면 나는 창문 가에 앉기를 좋아한다. 산과 들녘에 여기 저기 모여앉아 있는 농촌의 집들은 지붕과 울타리의 외형만으로도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준다. 잠시 동안 창문에 갇혔다가 놓여나는 마을에는 지나간 유년시절과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원시적인 삶의 원형이 들어있다.

그것은 시냇물의 밑바닥에 깔려 있어 보이지 않지만 조그마한 요동에도 잠시 떠올랐다가 곧 바닥으로 가라앉는 물 먼지들처럼,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그 존재를 결코 부정할 수 없이 늘 의식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현대화되어 가는 농촌을 보면, 우리 추억의 부분들이 망가져가는 것 같은 서글픔이 느껴진다.

창문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것에 익숙해진 나는 우리 마음 속에도 창문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며칠 전에 온 국민을 흥분시킨 폭력사건이 기사화되었는데, 그 반응들도 아주 다양하다. 더러는 일가견을 가진 전문가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며 다투는 사람들도 있다. 한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것이 놀랍다.

하기는 얼굴 모양이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는데, 시각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시각의 차이는 개개인의 창문 모양과 크기, 방향에 따라 떠오르는 그림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방안의 크기와 그 안에 들어있는 가구들이 창문에서 바라보는 각도를 다르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내 창문을 넓혀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지금도 상대하고 싶은 유형은 한정되어 있다. 만나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은 변함이 없다. 매일 아침 일상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산위에서 시가지를 바라보듯 관여하는 것들을 조망하리라 마음먹는다. 하지만 일과가 끝나고 집에 와서 피곤함을 녹여내면서 생각해보면 창문 안의 풍경처럼, 테두리를 거의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껄끄러운 사람들로부터는 되도록 멀리 우회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끌리는 감각적인 선택을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책을 할 때가 있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면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리며 아까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실소 할 때도 있다.

내 방안에는 유년기에서 시작된 자의식이 청년기나 장년기로 성장할 때에도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고, 바닥에 숨죽이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서 재빠르게 나타났다가 다시 잠수하는 여러 개의 자아가 들어 있다.

유치함과 성숙함이 혼재하는 여러 개의 틀이 창문의 테가 되어 내 시야를 한정한다. 지금은 오랜 세월 동안에 미세먼지들이 내 창에 쌓여서, 이제 아무리 애를 써도 덤벙대고 폭발적이어서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빛나던 그 시절의 맑음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좁은 방안의 가구들을 들어내어 방안을 넓히고, 더럽혀진 창문을 통해서 최선의 아름다운 그림을 찾아내려고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