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철학자

 

 

                                                                                       엄정식

대학진학을 앞두고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을 때 한 가지 걱정은 생계에 관한 것이었다. 삶의 의미를 논하고 우주의 근원과 자아의 행방을 규명한다고 해서 누군가가 월급을 주거나 어떤 형태의 대가를 지불해 주는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철학의 시조인 탈레스는 올리브를 재배하는 기계를 고안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철학자의 관심은 진리의 탐구에 있지 재물의 획득에 있지 않음”을 주장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최소한의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진리의 탐구에 몰두할 수 있을 것인가. 철학도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대학을 졸업한 후 무슨 일을 해야 좋을지 몰라 고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어느 작은 회사에 세일즈맨으로 취직이 되어 겨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나 그 일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맞이하여 구매욕을 돋우고 판매를 유도하는 대신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묻는 말에 무성의하게 대답하기가 일쑤였다. 오히려 나는 그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왜 그 물건을 사려는 것인지, 도대체 그들은 왜 살아가는 것인지 등에 관해서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결국 나는 1년 남짓 근무하다가 그만 두고 말았다.

그 후 다행히 유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 학위를 받게 되었고 대학에 직장을 얻어서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철학교수로서 직책을 수행해 오고 있다. 그동안 나는 결혼을 해서 세 자녀를 두었고 어느 정도 생활 기반도 마련하였다. 건강 상태도 그런대로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며 적어도 당분간은 계획한 일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도 큰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마디로 나는 이른바 세속적으로 ‘행복한 사람’이 된 것이다.

올해 나는 정년퇴임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난 6월 종강하는 자리를 빌려 마련한 ‘고별강연회’에는 서강대 학생들과 철학계 인사들, 그리고 평소에 교분이 두터웠던 친지들이 몰려와서 축하해주었다. 꽃다발과 선물도 많이 받았고 내빈들의 격려사와 헌사들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다.

무엇보다 특기할 것은 작가인 아내가 ≪행복한 철학자≫라는 책을 집필해서 그날 출간했다는 사실이다. 그 책은 나를 곁에서 지켜보며 묘사한 다양한 일화들로 이루어져 있다. 삽화는 미술을 전공하는 딸이 맡아 그려주었다. 마음이 넉넉한 크산티페가 철이 덜 든 몽상가인 소크라테스를 그렸다고나 할까. 믿음직한 맏아들과 철학을 전공하는 막내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게다가 조용히 머물며 저술에 몰두할 수 있는 시골집이 있으니 ‘행복한 철학자’라고 묘사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의미로는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이고 또 철학자란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 일반적으로 행복은 어떤 개인이 경험하는 만족감으로서, 그것은 일종의 심리적 개념이다. 그러나 행복은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 자신만의 만족감으로 이루어지는 이기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즐거움을 다른 사람과도 나눌 수 있을 때 경험하는 윤리적 개념이기도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이 행복을 삶의 궁극적 목표로 규정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행복은 이성적 인간만이 장기간에 걸쳐서 수립한 인생의 계획이 이루어졌을 때 느끼는 합리적 개념이기도 하다. 가령 강아지가 맛있는 먹이를 얻었을 때 즐거울 수 있겠지만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어떤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충격에 가까운 기쁨을 누릴 수 있겠지만 행복해졌다고 볼 수도 없다. 실제로 가난하게 살다가 복권에 당첨되어서 불행하게 된 사람들의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행복은 행운이 따라와 주어야 하는, 혹은 자연의 섭리나 신의 의지가 작용해야 하는 섭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오래 사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행복을 합리적인 인생 계획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원만한 관계를 지니며 살아가는 동안 누릴 수 있는 만족감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대체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철학에 정진해 왔고 훌륭한 직장을 얻어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행복한 ‘철학자’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철학자란 ‘철학’만큼이나 애매한 개념이다. 철학은 그리스의 어원에 따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전문적인 의미로는 지혜를 사랑하거나 터득했다고 해서 모두 철학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철학은 일종의 학문이며, 그것도 사물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를 궁극적으로 규명하는 학문이다. 그것은 너무도 궁극적이어서 현상 뒤에 있는 본체뿐만 아니라 이 모든 것의 근원인 신의 존재마저 문제 삼으며, 그것을 규명하는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도 동시에 탐구한다. 러셀이 말했듯이 철학은 엄밀한 방법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고 그 주제가 심오하다는 점에서 신학적이기도 하다. 참으로 훌륭한 철학자란 이러한 작업을 훌륭히 수행하여 시대적 소명에 적절히 부응한 인물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 데카르트와 흄, 칸트와 헤겔, 니체와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 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분명히 훌륭한 철학자이지만 동시에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밖에도 고독과 절망, 불안과 소외 그리고 자신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결코 행복했다고 할 수 없는 철학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훌륭한 철학자가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고 행복한 철학교수가 훌륭한 철학자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젊었을 때 원만한 인격을 소유한 행복한 철학 교수이기 보다는 성격은 괴팍하고 모가 났지만 ‘한 시대를 긋는 위대한 철학자’가 되고 싶었다. 내가 참으로 원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훌륭한 철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날 고별강연회에서 아무도 그러한 표현을 내게 쓰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는 성공하지 못한 철학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철학자가 과연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행복하지 못하더라도 철학적인 의미에서 성취를 이룬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철학자’였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거의 모순에 가까운 개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개념을 현실적으로 실현해 보이는 것이 단순히 한 몽상가의 꿈만은 아니기를 기대해 본다.

꿈을 접지 않아도 되는 그는 행복한 철학자’라는 말로 ≪행복한 철학자≫라는 책의 프롤로그는 끝난다. 몽상가들이 늘 그런 것처럼 나도 꿈을 꾸듯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