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편지

 

 

                                                                                             남민정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온 천지가 눈에 덮여 있고 그 위에 비치는 가로등만이 붉게 보이는 새벽입니다.

병원 휴게실 넓은 창가에 혼자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그대를 생각합니다. 눈이 오면 앞산의 설경이 그림 같다고, 안개비가 내리는 날은 먼 산이 바다처럼 보인다고 그래서 둥그런 능선들이 밀려가는 물결 같다고, 바람이 불면 처마 밑의 풍경이 저리 울어댄다고 전화를 하던 그대이니까요. 아마 지금 그대는 눈 내리는 새벽을 보지 못하고 잠들어 있겠지요.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 했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은 남편이 갑자기 병원에 누워 오랜 날을 지내야 할 때 그대가 나에게 준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다독여 주던 손길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 순간들을 어떻게 견디며 지나갔을까 생각합니다.

어느 날은 갑자기 병원으로 달려와 아무 말 없이 등 두드려 주고 떠나고, 어느 날은 나 몰래 눈물만 훔치다가 돌아갔습니다. 언젠가는 나를 찾아오다가 교통사고가 났었지요. 차 뒤 트렁크가 절반이나 쭈그러들었는데도 그대로 달려와 가져온 무공해 식품들 내려놓고 겁 없이 몇 시간을 다시 달려가 정비업소에 차를 맡긴 일도 있었지요. 그 때 정비소 직원이 생명이 오가는 상황인데 이 차를 운전하고 고속도로를 달렸어요? 하며 나무라더라고 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컴퓨터를 열면 어김없이 어젯밤에 보낸 그대의 편지가 밤새워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프지 말라고, 용기 내라고,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 어느 아침은 정호승의 시 한 수로 나를 위로 하고 어느 날은 송지문의 유소사(有所思) 한 구절로 나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보낸 아침 메시지로 나는 힘차게 다시 일어나 하루를 지내고 했지요.

그러나 그대가 아파 며칠이고 쓰러져 누워 지날 때에 나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 걱정하는 전화만 하지요. 어서 훌훌 털고 일어나 밀린 일 하라고 조르기만 했습니다. 언제 아팠는지 모르게 또다시 일어나 순명처럼 그 많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저걸 어쩌나! 저러다 또 쓰러 질 텐데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이 그대를 위한 내 마음 전부였습니다. 일에 지쳐서 어제 쓰러졌다 오늘 일어나고 내일 쓰러졌다 모레 일어나는 그런 힘에 겨운 일들은 이제 옆으로 밀쳐놓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이제부터는 보은의 뜻으로 살아가려는 그대의 마음가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않으면서 이웃 어른들의 어려운 형편 살피기며 통장 털어서 불우한 아이들 급식비 주려고 마을 학교로 달려가는 것을 볼 때마다 내 식구 챙기기에도 버거워하는 내가 부끄러워지지요.

내게 온 지금의 날들을 구김살의 세월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삶의 문양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하지요. 살아온 흔적의 자국인 잔주름이 아니라 갑자기 주저앉게 되어 생긴 구겨진 주름입니다. 나는 지금 그 주름을 펴려고 다림질을 하고 있는 과정이구요.

어쩌면 인생은 다림질 작업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살다가 구겨지면 다시 펴려고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바꾸어 가며 최선을 다해 다림질을 하지요. 그러다가 또 구겨지면 다시 다림질로 펴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 뿌려 주고 손바닥으로 두드려주며 다리기만 하면 모든 구김살은 다 펴지는 줄 알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영영 펴지지 않는 구김살도 있을 것입니다. 다리고 또 다리며 다림질에 지치기보다는 구김살과 동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오면 다리미 밀어 놓고 구겨진 그대로 세월 따라 같이 가야 하겠지요.

이렇게 눈이 내렸으니 그대는 오늘 저녁 낙엽송으로 군불을 지피겠군요. 나도 달려가 따뜻한 아랫목에서 그 때처럼 청자 찻잔에 목련차를 마시고 싶어요. 그리고 못다 한 이야기 들으며 웃기도 하고 못 다 한 이야기 들려주며 눈물짓기도 하다가 하현달이 기울면 잠들고 싶습니다.

희미한 여명 속에 눈은 아직도 내립니다. 그대는 지금쯤 눈 치운다고 털신 신고 나와서 눈 치울 생각은 안하고 새 먹이 준비하여 산에 오르려 하고 있지요? 솟대에 쌓인 눈도 흔들며 털어 주었지요? 눈에 묻힌 벌통 들여다보며 벌들은 잘 있나 기웃거리지요?

곧 퇴원을 합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살아가다가 왜 주저앉고 싶은 날이 없겠습니까. 그 때마다 그대가 내 허리에 매어 놓은 보이지 않는 끈이 뒤에서 잡아당기겠지요. 넘어지지 말라고 호통 치면서요. 아니, ‘절반의 절망’에는 언제나 ‘절반의 환희’가 남아 있다는 것 잊지 말라고 타이르면서요. 그 반半과 반半을 비우고 채우는 것은 바로 당신의 몫이라고 다독여 주면서요.

함박눈 내리는 오늘은 내가 먼저 새벽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를 그대가 읽을 때에도 그 곳 서재에서 훤히 보이는 앞산 먼 산에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