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내정사關內程史

 

 

                                                                                        金菊子

5월15일 산해관에서의 아침.

호텔에서 미역국, 흰죽, 계란으로 아침을 먹었다. 중국 여행에서 아침은 흰죽에 땅콩과 짜차이를 조금 넣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아침 8시에 버스에 오르면 여권을 한번 만져보라고 한다. 그 다음은 교수님의 강의가 시작된다.

“1780년 7월24일 경자庚子에 시작하여 8월4일庚戌에 그친, 모두 11일 동안, 산해관에서 연경까지 640리길” 오늘은 <열하일기熱河日記>중에 관내정사 편이다.

호텔을 출발한 버스는 잠시 각산장성角山長城 을 보기로 했다. 초입에 이자성李自成의 동상이 서 있었다. 명나라(1368 - 1644)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를 제위에서 몰아낸 농민 반란군 지도자로 명에 충성하던 오삼계吳三桂에 의해서 쫓겨나 중국 북부 후베이 성에서 살해되었던 사람이라고 한다.

각산부터 가욕관까지는 장성이 끊이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두 명씩 리프트를 타고 각산에 올랐다. 리프트에 내려서도 정상까지는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갔다. 다른 장성들은 잘 수리되어 있는데 비해 이 장성는 흙과 돌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들판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의무려산이 동으로 달려서 후진後鎭이 되어 용이 나는 듯 봉이 춤을 추는 듯 각산角山에 이르러 뭉뚝 잘리어 산해관이 되었다.” 연암도 이렇게 표현했다.

일행은 각산에서 내려와 버스를 타고 무녕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무녕 시내를 오전 10시 15분쯤 지나 갈석산을 바라보며 버스는 달렸다.

“창려昌黎에 이르자 모든 바닷가 고을 들이 더욱 아름다웠다. 우공禹貢의 갈석碣石이 창려현 서쪽 20리 되는 가까운 곳에 있으니 위무제魏武帝 조조曺操의 시에 ” “동으로 갈석에 다다라 아득한 저 바다 구경코자…….” 연암도 이 시를 떠올리며 이곳을 지나갔을 것을 생각하며 차 창 밖을 내다보니 가로수 밑동이 제법 굵어 보였다.

“무령현을 지나자 성안 거리에는 집집마다 금편金篇, 옥서玉署요. 패루가 곳곳에 휘황찬란했다. 부사와 서장관이 집 구경을 하기 위해서 어느 집 앞에서 가마를 멈추었다.”

진사進士 서학년徐鶴年의 집이었다. 서학년은 본래 성품이 좋아서 백하白下 윤판서 순淳을 만나 극진히 대접하고 집에 가지고 있는 서화를 보였다고 했다. 윤공은 그 시대 우리나라 명필의 한 사람이다. 침실 문설주에는 윤공이 쓴 칠절七絶 한 수를 붙여 놓았고 극진한 대접을 했다고 한다. 그 후 무령현 서진사 이름이 알려져 사행使行이 반드시 이집을 들르게 되었는데 사행은 하인 수십 명을 거느린 까닭에 접대가 차츰 소홀해졌고 그가 죽은 뒤에는 조선 사람들을 귀찮게 여겼다는 것이다.

버스는 11시26분 영평永平시내에 도착했다. 연암도 영평부에 묵었다고 했다.

이곳 이제묘에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를 맞았는데 빗방울 크기가 주발만 하여 대국은 빗방울조차 무섭다고 했다.

일행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고향 동네를 찾았다. ‘沙洲律師務所’와 ‘新世界音像’ 간판이 걸려 있는 사이 골목길로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유아원이 있고 ‘夷齊井’이 보였다. 이제의 우물을 지나 언덕길로 올라가니 ‘淸節廟’ 라고 쓴 비석자리가 백이숙제의 사당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夷齊故里’라고 붉은 글씨로 쓰인 비석이 보였다. 언덕 위로는 벽돌 건물이 보였는데 현재는 감옥으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이 이런 역사의 현장을 아직은 손쓸 형편이 못 되어 그냥 방치된 상태지만 몇 년 후에는 잘 관리되리라 생각되었다.

버스길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니 허물어져 가는 적루가 보였다. 둥근 문 위로 검은 돌을 파서 붙인 ‘京望’이란 글이 보였다. 문 옆에는 ‘永平府’라는 비석이 서 있었다. 답사 팀들은 상기된 얼굴로 사진기를 글자에 들이댔다. 사실 그곳의 중국인들은 별 생각 없이 이곳을 지나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서울에서 이곳까지 와서 시간을 거슬러 연암의 길을 답사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허물어진 성벽 길을 걸어서 성루로 올라갔다. 성루에는 잡풀만 자라고 있고 잘려진 돌비석 두 개가 서 있을 뿐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옛사람들은 북경을 바라보고 그리워했다는 곳이다. 연암도 이곳에서 평양의 부벽루를 생각했다고 했다.

“영평부에 이르니 성 밖으로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성을 둘러싸서 그 지형이 평양과 흡사하다. 시원하게 툭 트인 것은 대동강보다 낫다. 다만 대동강과 같이 맑은 물이 없을 뿐이다.” 그리고 김학사金學士 황원黃元의 시 ‘넓은 벌 동쪽머리에 점점아 찍힌 뫼이로다’ 를 떠올렸다고 했다.

나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흥얼거리며 성루를 내려왔다.

12시 30분, 버스는 난하 다리를 지나갔다. 연암도 난하 다리는 건너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물은 조금 보일 뿐 농작물만 자라고 있었다.

일행은 사하沙河 외곽도로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제 저녁을 먹은 한식집에서 도시락을 특별히 부탁해서 준비해 온 것이다. 김밥, 장떡, 튀김등 맛이 좋았다. 중국에서 장떡을 먹다니! 특히 반장이 준비한 메론 맛이 일품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3시쯤 풍륜을 향해 떠났다. 풍륜은 청나라 초엽 조선인이 정착해서 벼농사를 짓고 종이를 만들고 부채를 만들며 살았던 곳이다. 현재도 풍륜 부채는 유명하다.

풍륜에서 고려보를 찾았지만 현재는 그 자취가 없다고 했다.

“고려보에 도착해보니 집들이 모두 띠 이엉을 이어서 몹시 쓸쓸하고 검소해 보였다.”

정축丁丑년 병자호란 다음해(1637)에 조선에서 잡혀온 사람들이 물벼를 심고 떡과 엿을 해먹었는데 사신이 오면 하인들에게는 먹은 음식 값을 받지 않았고 고국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지었다는 것이다. 하인들이 이를 기회로 도둑질을 하고 의복을 요구하는 등 행패를 부려 후에는 마치 원수 보듯 했다고 한다.

퓽륜에서 ‘高麗鋪 * 村委會’를 찾는 대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우리를 인솔한 허 교수님이 전 ‘豊潤 政治 協商 委員會’ 주임主任이며 현재는 소설 작가이신 張金池 선생을 만나기로 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점심을 준비하고 11시부터 우리를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다 못해 몇 잔 했노라며 오후 3시 넘어서 도착한 우리 일행을 반겼다.

짧게 자른 희끗희끗한 머리에 붉은 셔츠를 입고 계신 장 선생님은 중국인 특유의 여유와 품이 있어 보였다.

‘오늘은 대단히 기쁜 날이다. 10년 전 허 선생을 만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이곳은 중국과 한국의 우의가 투철한 곳이다. 풍륜 역사박물관을 만들어서 옛 조선인들이 쓰던 유물을 전시할 예정이니 다음에 다시오면 보여주겠다.’ 그는 위원장답게 말씀도 잘하셨다.

허 교수님은 <나의 지팡이>라는 시를 선물했고 장 선생님은 꽃그림 도자기를 허 교수님께 선물했다. 우리는 박수를 여러 번 쳤다. 장 선생님은 떠나는 우리 일행을 전송하기 위해 버스까지 올라와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4시쯤 풍륜 톨게이트를 지나 북경으로 가기 위해 당산唐山 방향으로 달렸다. 실은 연암이 갔던 길은 풍륜에서 옥전, 계현, 방균, 연교를 거쳐 북경으로 가야 하는데 도로 공사로 큰 버스는 지나갈 수가 없다고 하여 시골 길을 헤매다가 결국은 고속도로로 진입할 수밖에 없었다.

옥전은 연암이 인가를 구경하다가 심유붕沈有朋의 집 벽에 걸려 있는 기문奇文을 보고 베껴 와서 훗날 <호질전>의 이야깃거리를 얻은 곳이고, 어양은 양귀비 사당과 알록산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이번 여행에서 안타깝게도 길 사정이 좋지 않아 옥전, 어양, 연교를 들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실은 며칠을 덜컹거리는 구 도로로 달리다보니 어제 저녁에는 허리에 통증이 왔다. 파스를 붙여 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어 오늘은 진통제를 먹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다보면 아픈 사람도 생기고 좋지 않은 일도 일어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잘 참고 있는 것 같아 선배님들이 존경스러웠다.

잘 닦여진 고속도로를 달리니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달리는 시대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오후 6시 30분 드디어 북경에 입성했다. 연암은 8월 1일에 북경에 입성했다고 했다.

산해관에서 연경까지 11일에 걸려온 관내정사關內程史부분을 우리는 오늘 하루에 온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