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

 

 

                                                                                   이은희

세 살 남짓한 준호가 주인 행세를 한다. 아이는 시골집에 당도하자마자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려가 살구바구니를 들고 나온다. 그리고 할아버지 댁에 방문한 우리에게 살구바구니를 불쑥 내민다. 중얼거리는 표정이 우릴 보고 먹으라는 시늉 같다. 작은 주인 행세를 하는 아이가 기특하다. 아이는 무엇 때문에 살구바구니를 안고 달려와 내미는가. 아마도 손님을 맞는 자세이지 싶다. 예전부터 이어온 나눔의 정을 아이가 흉내 내고 있는가 보다.

며칠 전, 막내 여동생이 침울한 목소리로 걱정거리를 털어놓았다. 다음 주에 안사돈 어른이 고관절 수술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맏며느리인 여동생은 걱정이 태산인가 보다. 개구쟁이 준호를 데리고 병간호할 일이며, 장마가 오기 전에 감자 캐기, 고추나무 줄 매기, 옥수수 따기, 깨밭 풀 뽑기…. 해야 할 일을 열거하며 푸념을 털어놓았다.

저녁 내내 막내의 목소리가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벌이기 선수인 내가 알고 있는 이상, 막내의 걱정거리를 불구경하듯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일요일 아침, 남편과 나는 동생들의 단잠을 깨우는 불청객이 되었다. 사돈댁의 일손을 돕기 위해 친정식구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멀다면 멀고, 어렵다면 어려운 사돈지간이다. 그런데도 나는 막무가내로 친정아버지께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동생들의 염려가 맞아떨어졌다. 사돈댁을 어찌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냐며 딸들까지 만류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일손을 자처한 이상 강행군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추나무 줄 매기

사돈댁은 음성에서도 한참 더 꼬불꼬불 들어간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조카들은 준호를 따라 우르르 사슴농장으로 몰려갔고, 어른들도 신기한 것을 본 양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일손으로 달려온 가족을 본 사돈어른의 표정은 함박꽃이 되었다.

고추나무는 이미 두 줄로 매여져 있었다. 앞으로 다가올 장마와 태풍에 대비하여 한 줄을 더 매 두어야 한다고 했다. 무릎 위까지 올라온 고추나무는 이미 풋고추가 탐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막내제부는 ‘줄 매기는 일 같지도 않은 일이며, 시간과 품값이 제법 많이 든다.’며 하소연한다. 막대와 막대 사이에 고추나무를 가지런히 모아 넣고 끈을 질끈 동이는 일은 보기에는 아주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만만찮은 일이라는 걸 손수 해보고서야 느낀다.

역시 농촌에서 자란 남편과 둘째 제부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일사천리다. 나는 손에 익지 않아 부연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줄을 잡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줄이 엉켜 그 줄을 푸느라 시간을 지체한다. 남들이 두세 고랑 이어갈 때 겨우 끙끙거리며 두 고랑을 마무리 짓고 조카들을 돌보는 일로 밀려났다. 정녕 세상엔 쉬운 일은 없나 보다. 고추밭으로, 도랑으로 망아지처럼 뛰어 다니는 조카들을 잡는 일이 더 힘들다는 걸 그 누가 알아주랴.

아이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무렵, 사돈어른은 연령층에 맞춘 간식거리를 사들고 나타나셨다. 그야말로 사돈어른은 구세주였다. 막걸리와 수박, 아이스크림을 가져와 ‘일도 흥이 나야 한다.’며 밭에서 어서 나오라고 불렀다. 먹을 것 앞에선 누구나 기쁨으로 하나가 되는가. 밭두렁에서 형식 차리지 않고 쭉쭉 삐져먹는 수박 맛은 그 어떤 과일보다 맛있고 시원하다. 나의 손길을 거친 고추밭 때문이리라. 줄 매기를 끝낸 고추나무는 마치 옥색한복을 차려입은 여인이 치마폭을 여민 것처럼 함초롬하다.

감자 캐기

감자를 캐야 한다는 말에 혹하여 넘어갔다. 사돈댁도 불사하고 일손을 자청하였다. 감자 이삭줍기는 더러 해본 일이다. 정작 감자를 캐본 일은 없었다. 뿌리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알감자를 한 알씩 따는 손맛과 땅속에 숨은 감자를 찾아내고 싶었다. 그러니 그저 재미삼아 즐기고픈 감자 캐기가 아닌가.

그러나 2천 평이 넘는 고추밭처럼 집에서 먹을 만큼 감자를 심었다는 밭고랑의 범위는 내 상상 밖이었다. 길게 쭉 뻗은 여러 고랑을 본 나는 눈앞이 까마득했다. 아무 생각 없이 감자밭은 여자들이 책임지겠으니, 남자들은 고추밭 일이나 끝내라고 큰소리를 친 연후였다. 점심으로 몸보신까지 했으니, 밥값을 톡톡히 해야만 했다.

감자 캐기는 일단 밭에서 푸른 줄기를 뽑아낸 후, 한쪽으로 비닐을 걷어내는 일로 시작된다. 다음으로 감자가 상하지 않도록 흙을 살살 파헤치는 호미질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고랑을 끝내니 허리조차 펴지지 않았다. 온몸은 땀으로 목욕을 한 듯 끈적거렸다. 큰 것, 작은 것을 가려 자루에 넣는 일 또한 중노동이다. 저물녘이 되어서야 겨우 일은 끝이 났다. 농사일에 왕초보들이 이룬 감자 캐기와 고추나무 줄 매기, 애초에 계획했던 일들을 끝내서 무엇보다 다행스러웠다.

우리는 마트에 진열된 농산물을 쉽게 구입하여 식탁에 올린다. 동생에게서 사돈어른이 보내주신 고추를 여러 번 거저 받은 적이 있다. 그것이 여름내 고생하여 추수한 고추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기까지 하다. 농촌은 지금 연로하신 어른들이 남아 땅을 지키고, 일구며, 가꾸고 있지 않던가. 일손을 얻자니 수지가 맞지 않고, 땅을 놀리자니 죄를 짓는 것만 같다는 사돈어른. 그래도 ‘젊은 사람은 도시 일을 해야 한다.’는 어른의 말씀에 가슴이 짠하다.

사돈어른과 제부들은 팔월 어느 날 어른이 부르면 그곳으로 달려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삼복더위에 고추 따는 일은 더위에 약한 내게는 힘겨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어찌 그 끈끈한 정을 외면하랴. 하여 소식이 오면 나도 달려가리라. 사돈어른의 환한 웃음과 봉지 가득가득 인정을 담는 마음, 가족들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어찌 잊으랴. 작은 주인 준호는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을까 자못 기대가 된다.

 

 

2000년 <<월간문학>> 등단. 2004년 제7회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수상.

저서로, 2005년 <<검댕이>>, 2007년 <<망새>>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현재 (주) 대원 관리이사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