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다른 사다리

 

 

                                                                                       장미혜

고색창연한 담을 끼고 걷는 거리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동생 면회를 못하고 병원에서 쫓겨난 내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병원에 입원했던 20여 년 전의 기억이 어느덧 흑백필름으로 다가온다.

사전 지식 없이 시작된 이민초기의 임신은 많은 것에 혼란을 겪어야 했다.

12월 12일 새벽, 무려 거의 하루에 달하는 17시간을 진통으로 고통을 겪다 끝내 실신 속에서 수술을 하고야 아기를 낳았다. 그리고 산욕열로 2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그동안 나는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도 자유롭게 대할 수 없었고, 친구들이 끓여다 준 미역국은 먹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병원 냉동실 속으로 들어가 꽝꽝 얼린 채 생각으로만 먹어야 했고 첫날부터 스테이크를 먹어야 했다. 이가 물러앉는다고 부드러운 음식만 먹어야 한다는 한국식 산모의 주장은 호주 간호원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호주식으로, 많이 먹어야 젖도 잘 나오고 빨리 쾌유된다고, 손도 못 대는 음식들을 강제로 입에 떠 넣어 주기까지 했다. 그런 따뜻한 태도와 정성 앞엔 무기력해졌고, 심지어 맛난 음식이라고 자신들이 즐겨 다니던 카페에서 사온 음식을 내게 내밀기까지 했다. 가족 친지 없는 나의 입장을 고려해주던 간호원들, 그래서 더 신뢰할 수 있는 인간적인 따스한 정을 느끼게 했지만 하늘에선 파란색의 물이 뚝뚝 떨어지는 한여름을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몸은 12월 중순의 한국을 떠올리게 하는 추위로 떨었다. 엄마가 보고 싶고 미역국에 흰 밥을 먹고 싶어 입술로는 웃음을 짓지만 눈에는 항상 눈물이 그득했었다.

신생아의 황달이었는데 아이에게 황달이 나타났다고 어린이병원의 전문의가 노상 아이를 체크했다. 우리네 할머니들이 살아온 지혜인 음식 문화와 태생적인 현상에 불과한, 태어난 지 일주일이면 찾아오는 황달에 대한 내 의견은 정부의 자산으로 계산되는 신생아의 권리를 무시한다고 부드럽게 나를 설득했던 원장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다못해 남편은 학교의 일본학 교수에게 부탁해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산욕열과 몽고반점, 신생아 황달은 학계 보고용으로 작성되었다. 2주 입원 기간 내내 내 몸은 40도를 오르내리는 열을 식힌다는 명분으로 선풍기와 알코올목욕으로 진저리가 났다. 덕분에 지금도 고생을 하지만 체질이 다른 이네들과 우리에 대한 비교논문이 없던 때라 선구자로 호주 의학계에 기여한 공로자가 된 셈이다.

오전 9시부터 11시, 2시부터 8시까지의 면회시간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산모의 절대 안정이 필요한 순간을 어찌 그리도 잘 아는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싶어도 방문자가 있을 땐 가슴을 풀어 헤칠 수 없는 초산의 산모는 그들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퉁퉁 불어 가슴이 아파올 즈음 간호원은 산모의 휴식을 위해 멀리 떼어 놓았던 아이를 데리고 오면 복도 저 멀리에서부터 울음소리로 내 아이인 줄 알았다. 한순간의 기다림이지만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는 안쓰러움이 뭉클 솟아나오고 그렇게 만난 아기는 빨간 핏덩이지만 가슴에 꼬옥 안겨 뺨을 비비곤 했었다. 세 시간의 간격을 두고 길들여 가야만 집에 가서 엄마가 피곤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산모위주의 정책이 처음엔 너무 비인간적이라고 투덜거렸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방법 중의 하나란 것도 알게 되었지만. 이렇게 일정한 시간의 휴식은 너무도 감사한 순간이기도 했다. 정부가 출산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나라답게 산모와 아기가 병원에 있는 동안 보호자의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공부와 일을 병행했던 남편은 저녁 무렵에나 오곤 했다. 옆 침대의 방문자들이 줄 서있을 즈음, 야윈 얼굴의 남편이 미안한 마음을 얼굴 가득 드리운 채 내 침상엘 다가올 때면 왜 그렇게 서글퍼지던지. 아기목욕부터 산모의 샤워, 밤샘 심부름까지 일거수일투족 버튼만 누르면 쏜살같이 달려오는 간호원들의 친절은 2주 동안의 병원생활은 열이 오르는 고통과 허전한 마음을 빼면 최상의 대우였다.

3년 전 갑작스런 엄마의 허리 수술로 한국행 비행기를 탔었다. 공항에서 P병원으로 바로 간 내 눈앞엔 커다란 1인실에 따끈따끈한 방바닥이 있고 한 옆으로 널찍한 환자 침대가 병원이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풍요로워 보였다. 지인의 병원이라 모든 것을 배려해 줘서 그렇기도 하지만 발전된 한국의 현주소가 거기에 있었다. 어려서부터 병원출입이 잦았던 내 인생에서 채 상상하지 못한 눈앞의 상황은 이민을 감행했던 지나온 호주에서의 생활이 후회되었다. 호주에서처럼 노력했다면 내 나라, 내 땅에서 더 즐겁고 기쁜 20년의 세월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함께.

비교하지 말자는 내 이성과 끊임없이 비교되는 내 감성의 싸움은 처음 며칠 동안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하지만 차츰 어쩌면 잘 떠났을 수도 있다는 일들이 발생하면서 나의 갈등에 조그만 위안이 다가오기도 했다.

환자의 간호는 전적으로 환자 가족의 몫이었다. 간호원은 간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의사를 대신하여 환자에게 주사를 놓고 혈압과 열을 재며 그것을 기록하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 약을 줄 뿐, 전혀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 모든 일들은 간병인이란 새로운 직업군으로 형성된 사람들이 맡았고 이분들의 수고료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만약 재정적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입원했다면 그는 모든 것에서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그의 가족들의 마음마저 아플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항상 뽀송뽀송하고 하늘거리는, 며칠이 지나도 부드럽기만 했던 엄마의 머리에서 냄새가 났다. 4월의 날씨와 산부인과 병동답게 실내온도는 상당히 높게 유지되어서인지 엄마의 몸은 땀으로 축축해지곤 했다. 한국의 환자는 거의 퇴원할 때까지 샤워를 시키지 않고 환부만 대충 약솜으로 닦아냈다. 환자의 청결과 적당한 운동과 함께 환자로서 대우 받아야 하는 환자의 권리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병원의 법칙이 횡포로까지 여겨졌다. 서울에서 손꼽히는 병원이 이 정도라면 다른 2급, 3급 병원들의 수준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엄마를 침대에 누인 채로 마른 목욕을 시킨 후 머리를 감겨 드리면서 호주병원이 떠올랐다. 병상이 거의 8백 개가 넘는다는 병원임에도 신체 부자유자를 위한 이동식 샤워기는 겨우 2대, 그것으로 이 많은 환자들을 목욕시킨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환자가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라도 머리를 감겨드리니 엄마는 무척 개운해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난 병원 생각을 하면 실용적인 호주 생활에 아주 쬐끔 흡족할 수 있었다. 적어도 환자가 대우받는 호주에서의 삶에서 불평을 거둘 수 있었다.

한국 병원 생각을 하니 아까의 불편했던 기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느긋하게 카페에 앉아 점심을 먹고, 지인과 수다를 떨며 면회시간인 두 시가 되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이제 충분히 잠을 자고 난 후의 산모 모습을 보러 갈 수 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뗀다. 계속 걸려오는 한국에서의 전화는 아직까지 동생을 보지 못했냐며 나를 탓한다. 백이나 윗사람의 힘이 절대 통하지 않는 이곳의 생태를 모르는 그네들에게는 내가 너무 한심한 언니로 보이나 보다. 같은 병원의 산부인과 레지던트인 미스터 안은 동생을 미리 만나지 못하는 내게 계속 미안해하다 점심을 먹는 내 테이블로 와선 싱거운 농담을 했다.

“나도 누나에게 가려면 간호원실에서 막아요. 내 환자가 아니기에 못 들어 간다고.”

오늘도 나는 한국과 호주 두 개의 다른 사다리에 한 발씩 얹고 서로 다른 삶의 조건들로 선망과 불평을 섞어가며 한 발씩 오르며 살아가고 있다.

 

 

<<수필문학>>(2003)으로 등단.

호주 시드니 수필회원,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