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이야기

 

 

                                                                                       한계주

십년은 되는 성싶다. 아이들 따라 백화점에 갔더니, 모자가게 앞에 발을 멈춘 며느리가 모자 하나를 내 머리 위에 얹어준다. “웬 모자냐” 하고 머뭇거리다가 ‘방한용’이라는 바람에 거울 앞에 섰다. 검은 털실로 짠 것으로 돌아가며 가느다란 챙이 달려있다. 왼쪽 귀 옆에 꽃 한송이 앉아 있는데, 그 속에서 빨간 수술이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튀지 않으면서도 따분하지 않은 디자인이 마음에 닿았다. 그렇게 해서 모자와의 연이 시작되었다. 옛 할머니들이 명주수건으로 머리를 감싸듯 몇 해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다.

두 번째는 생각지도 않게 굴러들어왔다. 난대서숙에서 같이 강의를 듣는 희숙 씨가 회색 바탕에 검은 점이 희끗희끗한 도리우찌를 쓰고 나타났을 때 우리는 환성을 질렀다. 야, 멋있다, 하고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이 번갈아가며 그 모자를 썼다. 내 차례가 되자 모자 주인은 자기보다 내게 어울린다며 선뜻 내 머리 위에 얹어주는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희숙 씨는 누구 것이라기보다 누구에게 어울리느냐가 중요한 듯했다.

그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이 몇 장 있다. 난대서숙에서는 해마다 서당 앞에 줄장미가 한창이면 기념사진을 찍는다. 한번은 같이 사진을 찍고 흩어지는데 사진작가인 한 선생이 “잠깐”하더니 셔터를 눌렀다. 전문가의 손을 빌려서인지 사진이 썩 잘 나와서 커다랗게 늘려서 아이들에게도 돌렸다. 수필집 낼 때 이 사진 올리세요, 하는 친구도 있다. 그러다 50대로 알고 데이트 신청하면 어쩌나, 실물을 보고는 “어머니세요?” 할 거 아닌가 하고 킬킬댔다.

마치 내 코디네이터가 된 것처럼 다음 모자도 희숙 씨 선물이다. 골덴 천으로 만든 연한 보랏빛 모자는 앞창의 왼쪽이 위로 살짝 재껴진 것이 포인트다. 치마 한 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린 듯한 느낌인데, “이런 파격이 있어 삶이 따분하지 않지요.”라고 귀속말하는 것 같다.

모자도 제각기 사연을 안고 있다. 지난 어버이날에 옷을 선물했던 딸아이가 손녀 편에 상품권을 보내왔다. “모자 사셔야 해요.”라는 당부까지 곁들여. 손녀랑 가까운 백화점으로 갔다. 기껏 몇 만 원으로 알았는데 아니다. 가격표를 보고 달아나는데 손녀딸이 어느새 어미한테 문자를 보냈는지. “모자라는 돈은 보내주신데요.” 한다.

내친김에 찬찬히 모자가게를 둘러보았다. 한 코너를 지나는데 모자 하나가 갑자기 클로즈업되어 눈에 들어왔다. ‘모택동 형’이라는 그 모자를 보는 순간 저거 내 거야, 하고 손이 저절로 그리로 갔다. 선을 볼 때도 그럴까. “저 사람 내 사람이야.” 하고.

모자가 내게 어울려서인지 쓴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잘 닦은 유리창처럼 겉돌지 않아 새로 샀느냐고 묻는 사람도 없다.

한번은 그 모자를 쓰고 전동차를 탔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노신사가 건너와서 내 옆에 앉더니, “정말 멋있습니다.” 하며 들고 있는 부채로 바람을 보낸다. “냉방인데 웬 부채질입니까?” 했더니 “바람은 움직여야 바람이지요.” 하며 연신 바람을 보낸다.

그러고 보니 모자 덕을 톡톡히 보는 것 같다. 흰머리도 감추고 이마 주름도 가려져서 나이보다 젊게 보인다는 친구도 있고, 길 가다 놓쳐도 “너는 안 보이고 모자가 보이더라.” 하며 찾아오기도 한다. 조금은 유식하게 보이는지 “실례지만 어느 대학 교수님이세요.” 하고 나를 우쭐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구러 십년을 함께 지내다보니 좋은 동반자가 되었다. 어쩌다 그냥 나가면 “모자는?” 하고 모자 안부부터 묻는 걸 보면, 이제 아무개 하면 얼굴보다 모자를 먼저 떠올릴 것도 같다.

남의 것으로 알았던 모자도 내 것으로 하는데, 내가 놓아버린 많은 것들, 소질이 없다고 일찌감치 외면해버린 그림도 음악도 운동도, 그보다는 호흡이 맞지 않다고 멀리한 사람들, 그들을 끌어안고 살았다면 삶이 보다 풍요로워지지 않았을까.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인생을 접을 나이가 된 지금에야.

 

 

1992년 <<수필공원(에세이문학)>> 겨울호에 <감>으로 등단.

제17회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전호ㅏ여행>> <<아들네 집에 자 주러 갔다가>>

            <<둘이 하나 되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