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묘

 

 

                                                                                           김 광

막 어둠을 벗는 한강은 퉁퉁 부어 있다. 출입을 허용치 않는 여리고의 성문처럼 굳게 다문 입술로 침묵하며 느릿하게 옆걸음질 칠 뿐이다. 태백의 검룡소에서 시작된 걸음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몇 밤이 지났을까? 여느 산모퉁이를 지날 때 얻어들은 숲 이야기, 그 큰 가슴 속에 사뭇 쌓였으리라.

해가 댓 자나 올라야 바빠지는 한강으로 발령받아 온 지도 일 년이 넘었다. 얼마 동안은 몸은 이곳에 있어도 마음은 시청 앞 덕수궁 돌담길을 헤매느라 힘이 들었다. 가끔이지만 출근길에 시청행 전철을 타기 위해 걷다가 역사驛舍 앞에 이르러서야 ‘아차!’ 하고 피식 웃고 돌아설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서서히 내 몸에 한강물이 드는 것 같다.

어둠이 완전히 벗겨지지 않은 새벽에 집을 나와 한강시민공원으로 통하는 육갑문陸閘門을 들어서면, 부옇게 떠다니는 아침 안개가 기다란 강물 위로 속속 모여든다. 밤사이 한 뼘은 웃자란 담쟁이 석벽에 “잘 잤니?” 하고 인사를 건네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느릅나무 한 그루 의연히 버티고 선 녹지를 지나 호안 둔치로 내려가자, 얼마 전만 해도 새 부리처럼 벌어져 노랗게 삐악거리던 개나리 덤불이 이젠 초록으로 변해 있다.

둔치 바로 아래 자전거도로에서 아침운동 나온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온다. ‘탁탁’ 하는 소리는 황사 마스크를 쓰고 나온 아줌마들이 양팔을 어깨 위까지 내저으며 달리는 소리다. 멀리서 점점 큰소리로 다가오는 음악은 자칭 젊은 오빠라는 할아버지들이 사이클을 타고 오며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다.

‘헉헉’ 하는 소리…. 아하! 이건 말라뮤트인지 허스키인지가 주인을 끌고 오며 내는 거친 숨소리다. 산책로에 개를 데려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방송했는데도 별 효험이 없다.

발길은 자연학습장 쪽으로 향한다. 묘목단지로 들어서니 마치 모판을 보는 것 같다. 잘 다듬어진 회향목으로 울을 친 밭에는 거의가 이름 모를 꽃이다. 이랑 앞에 세워둔 팻말을 보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팬지는 종류도 많고 몸 크기에 비해선 꽃도 크고 색깔 또한 선명하다.

노랑팬지・하양팬지・얼룩팬지, 진한 향내를 터뜨리는 작약은 꽃송이가 어른 주먹만 하다. 앙증맞은 데이지, 흰색 꽃을 길게 늘어뜨린 꽃범의 꼬리, 무더기로 어우러진 졸방제비, 잉크색으로 꽃을 피우는 무스카리, 지면 패랭이라고도 불리는 꽃잔디, 모양새는 무던한데 이름이 참 고운 옥잠화, 어린잎은 나물로도 먹는다는 원추리, 이름이 재미있는 애기똥풀, 좌우간 별별 꽃이 다 많다.

머루・다래・으름나무 앞을 지날 때는 맑고 청아한 향기가 퍼지는 게 머리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그 외에도 은방울꽃・노루오줌・좁쌀풀・비비추 등…. 없는 게 없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일찍이 정원문화가 발달했던 중국의 어느 고택을 방문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곧은 머리칼을 하늘로 치켜세운 소나무들 사이로 진달래도 피어 있고 홍단풍・모과나무・향나무도 있고, 눈주목・좀작살나무・흰말채나무도 바위 뒤에 서 있다. 문인들이 자주 찾는 조팝나무도 있는가 하면 조밀한 조경이 지어내는 그림자가 약간은 답답했는데, 갑자기 환해진 하늘에 놀라 눈을 드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산딸나무가 큼지막한 흰색 꽃잎을 마구 터뜨리고 있다.

누가 이 학습장을 설계했는지 몰라도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을 참 잘 꾸몄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을 찾는 시민들이 모여 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군데군데 만들어 지루함도 피하고, 나무만 심은 게 아니라 언덕을 만든 뒤 모양 좋은 바위도 갖다놓았으니 도심지의 별천지라 할 만하다.

이곳의 식구가 꽃과 나무들만 있는 건 아니다. 때론 침묵하고 때론 속살거리는 한강을 지척에 두고, 물빛바람이 새벽을 깨울 즈음 이곳은 술렁이기 시작한다. 모과나무 아래선 그래도 젊은 축에 속하는 아줌마들이 걸어나오고, 진달래 덤불 앞 빈터에는 운동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나무에 등을 비비는 남자도 있고 지팡이를 의지해 조심스레 발을 옮기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따라 나온 강아지도 한몫을 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래도 복이 많은 사람들이다. 운동 후에 발그스레한 얼굴로 집에 돌아가면 샤워꼭지에 붙어 서서 물을 끼얹고, 아침상을 받을 테니 그것만 해도 홍복이라 할 것이다.

아침 일찍 출근해 사무실에 오르기 전, 나는 꼭 이들은 만나고 나야 하루가 온전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일 년을 넘게 한강에서 지내는 동안 겪은 일도 많고 고생도 많았지만, 그나마 이곳이 언제나 궁금해지는 이유는 나도 모르는 사이 이곳의 정취에 전이된 탓이리라.

때때로 사무실 베란다에 나가 바라보는 강……. 그 강물의 중심에는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하는 또 다른 모습의 내가 살고 있다. 봄이 오면 겨우내 궁금했던 강 상류 산골마을의 소식을 묻느라 재재거리는 내가 있고, 여름이면 폭양에 지친 몸을 담그고 물 위를 달리는 내가 손을 흔든다. 쇠락한 나뭇잎이 활처럼 휜 척추를 드러내고 공원을 기는 가을이 오면 한강물은 더욱 짙어진다.

검푸른 물결 사이로 나는 이지러진 얼굴이 되어 붉게 타는 저녁노을과 철교 위의 전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겨울에는 어떤가? 한발 다가선 하늘에서 눈발이 끊임없이 몰려오고, 강상의 눈雪들이 마치 흰나비 떼의 혼령만 같아 나는 그예 눈물짓고 만다. 이렇듯 넋을 한강에 두고 사는 나니, 어느 곳에 있어도 한강 생각이 뚜렷할 밖에…….

나의 이런 생각을 비웃는 사람도 있다. 감상感想이 지나치면 감상感傷이 된다나? 그렇다고 아름다운 걸 보고도 참고 있을 만한 인내심까진 내게 없다.

말없이 흐르는 한강……. 오늘도 비둘기 몇 마리 꾸르륵 졸고 있는 호안을 거스르며 난 순애純愛의 일기를 쓴다.

 

 

<<문학세계>>로 시 등단. <<계간수필>>로 수필 등단(2004년)

시집 <<바람이 사는 나라>>, <<구름 몇 장 내게 주더니>>.

공저 <<시인의 바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