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碑文 없는 비석

 

 

                                                                                       이종열

무슨 절이 대웅전도 없어! 사적 374호라는 인각사지麟角寺趾는 대웅전도 없는 쓸쓸한 절터였다. 수많은 백학이 서식했다는 학소대와 병풍처럼 펼쳐진 암벽屛岩이 주위를 감싸고 있기는 하나 대로변에 위치한 평지사찰이라 산사의 고즈넉함은 찾을 길이 없다.

화산華山(828m)에서 노닐던 기린의 뿔이 병풍바위에 떨어졌다는 인각사에는 화려한 기린은 어디로 갔는지 산비탈 판잣집에 좌정한 아미타불이 외롭고 국사전國師殿만 을씨년스러운 마당 한구석을 지키고 있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A.D. 642) 창건된 천년고찰이자,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1206-1289)의 하안지지下安之地이다. 국사는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하던 해에 태어나 만년에 운문사와 인각사 주지로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찬술撰述하였다.

일찍이 황룡사 구층탑(70m)을 보고, “이에 올라보라 어찌 구한만의 항복을 보겠는가, 비로소 천지가 특별히 평화로움을 깨닫겠네(登臨何啻九韓伏, 始覺乾坤特地平).”라며 기염을 토했는데, 승과에 장원급제한 이듬해 비슬산에서 정진하던 중(1228년)에 황룡사가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몽골이 팔공산 부인사 초조대장경과 구층탑을 불태운 것은 둘 다 호국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황룡사 탑이 불타던 날, 번지는 불길 속에서 무간지옥을 보여 주었네”라는 선배 스님(無衣子)의 시를 ≪삼국유사≫ <황룡사>조의 찬贊으로 달며 자신의 울분을 토로했다.

무인정권의 혼란, 몽골의 침략을 겪으며 민심은 황폐해갔다. 1할이 넘는 국민이 납치되었고 살육된 사람 수는 알 수도 없다. 강화도 항전체제의 정부는 백성을 버려둔 채 자신의 체모만 추구하며 고려청자를 빚고 있었다. 나라는 망하는데 때가 너무 늦었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민중에 희망을 주는 수밖에는 없다. 국사는 몽골의 삭풍에 짓밟힌 약소국의 자존심과 민족의 슬픔을 단군을 국조로 모시는 ≪삼국유사≫로 담아내었다.

절망의 시기를 산 것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1944)도 마찬가지였다. 비정한 역사에 맞서 삼일운동을 주도하다 참담한 좌절을 겪었다. 만해는 망국의 아픔과 독립에의 희망을 담담하게 승화시켜 검은 구름이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이라는 불교적 명상으로 보여주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중략)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에서 -

국사전 뒤뜰에는 부도浮屠(보물 428호)탑과 비각碑閣이 있다. 기울어진 탑은 상층에 불상, 중층에 연화蓮花, 하층엔 토끼·사자·원숭이 등이 조각된 고려 후기 양식이다. 앉아서 입적入寂한 국사는 죽을 때 자신의 부도 터를 지목하였다. 처음엔 절의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부도골에 있었으나 지역세가에서 산소를 쓴다며 팽개쳐 둔 것을 1978년에 사찰 경내로 다시 옮겼다.

비각에는 구들장처럼 생긴 검은 돌 두 장만 달랑 모셔져 있는데, 그 돌에는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는다. 원래 비문碑文은 당시 문장가 민지閔漬가 짓고, 글씨는 왕희지의 유필遺筆을 집자集字하여 만들었다.

글씨가 명품이라 조선조에 명나라 칙사들에 이어 일본학자들이 탁본한다며 수없이 두드리다보니 견디지 못하고 모두 마모되어버렸다.

화산계곡으로 떨어지는 석양이 옥녀봉에 잔영을 드리우고 군위軍威의 젖줄 위천엔 산안개가 풀린다. 역사에 예정된 코스는 없다. 강대국의 틈새에서 통일을 생각하며 살길을 모색하고 있는 오늘의 형세도 팔백 년 전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힘이 없는 평화는 구두선이고, 참회가 없는 자서전은 변명에 불과하다. 비문조차 지켜내지 못한 보각국사의 비석은 못난 우리의 자화상으로 다가온다.

 

 

경북 청도 출생.

2006년 6월 <<에세이플러스>>에 <키위들의 연가>로 등단.

공인회계사, 현, 다인회계법인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