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가에서; 물과 함께 물같이 생각에 잠기면…

 

                                                                                          김열규

개울에는 사연이 많다. 높은 골짝에서는 짭짭거린다. 좁은 비탈에서는 재잘댄다. 깊은 늪을 지나갈 때면 웅얼댄다. 바다가 가까워지면 조용조용 수런댄다.

벼라 별 이야기를 별난 입놀림으로 소리 내고 있다. 더러 목다심도 하고 입가심도 하느라고 문득 침묵이 흐르지만 그것도 잠시다. 기복起伏을 달리하고 고저를 번갈아가면서 또 장단을 달리 하면서 사설辭說이 이어진다. 큰 소리 작은 소리가 서로 넘나든다.

우리 집 뒷산, 태산이야 될까마는 제법 크고 우람한 좌이산에서 흐르다 보면 점잖음을 떨 만도 하건만, 한바다 내려다보고 흐르다 보면 그런 대로 너그러울 법도 하건만 웬걸 우리 마을 개울은 상당한 수다쟁이다.

말이 많다. 사설이 많고 사연도 많다. 모두 속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말과 말투를 달리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낱낱이 따로 따로 듣기 전에는 한 목소리로 들린다. 많은 말, 허다한 사연이 하나가 되어서 울린다. 그것들이 각각 다변多辯스러울수록 입을 맞출 줄도 안다.

굽이며 꺾임이 다르고 너비며 경사가 달라서 제 각각 외따로 소리 울리게 되어 있다. 한데도 그것들이 필경은 하나로 어울린다. 그들은 교향악을 익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개울 들목에 서면, 나도 모르게 아! 소리가 길게 여운을 끈다. 가슴 틔는 탄성이 밖으로 울리면서 온 몸 안에 잔잔한 물살을 이룬다.

개울가에 서면, 개울을 따라 걸으면 절로 그렇게 된다. 그것도 예사 개울길이 아니고 비탈진 벼룻길을 갈 때면 탄성은 더 커지고 더 잦아진다.

도란대는 속삭임에 홀린다. 그게 그치기도 전에 졸졸대는 가락에 마음 기울인다. 그런가 하면 이내 콸콸거리는 울림이 귓전에서 화방수를 이룬다.

산기슭, 마을 뒤로 해서 개울을 타고 오르면 물소리, 흐름의 소리가 그렇게 달라진다. 자지러지다가, 웅성거리다가 수런거리기도 한다.

자유고 자재!

하지만 돌담, 흙담이 줄지어 선, 동네 안 고샅을 지날 때면, 개울 물 소리에는 마을 사람들의 삶의 사연이 메아리친다. 안방의 속살댐이 물골을 타고, 바깥채의 마른기침이 물 바닥을 울린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투로 소문들 주고받는 아낙들의 입질이 물보라에 대롱댄다.

‘잘 있었소?’

오랜만에 안부 묻는 마음이 은근하고

‘왜 그런다지?’

더러 토닥대는 수선도 개울 벽을 타고 전해진다.

마을을 빠져서 산기슭에 접어들면,

걸음도 어느 겨를엔가 흐름을 타고 물살과 길동무 한다.

어디 물 만인가.

개울 스쳐서 부는 잔바람은 갓 감아낸, 어린 소녀의 머리카락마냥 나부낀다. 개울을 깊게 누비는 바람에는 신명의 춤사위가 설렌다. 그럴 적마다 물가 언덕을 덮은 나무 잎 새들도 덩달아서 술렁댄다.

내 속마음에도 술렁임은 전해진다. 언제나 혼자이다시피 하는 마음의 여백에 뭣인가 반가운 사연이 무늬진다. 그것들로 중머리와도 같은 가만가만한 장단이 가슴 속에 자욱해진다. 그런 서슬에 물가, 돌밭 따라 걸음을 내딛는다. 물길이 달라져 있다. 흙바닥을 거쳐 갈 땐, 고분거리다가도 돌바닥을 만나면, 흐름은 성깔을 돋운다. 암상巖床이 조금 비탈지면 물줄기는 이내, 물사품 되어서 옅은 폭포마냥 쏟아진다.

그럴 때, 옛사람들은 개울을 석간石澗 또는 석간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물어박지르듯 하는 급류가 멎는 언저리, 거기에는 제법 깊은 웅덩이가 팬다. 늪이 되기도 하고 소를 이루기도 한다.

내리 쏟아지는 소란이 이내 침묵이 된다. 그 갑작스런 변심이 조금도 야릇하지 않다. 거칠수록 가라앉기 쉽고, 사나울수록 가만가만 해지는 그 묘리妙理와 묘법妙法에는 합장하고 고개 숙이는 게 옳다.

문득 멀리서 날라드는 흉한 소식, 덮치듯이 달려드는 다급한 사연들, 그들 대하고는 내 마음에도 웅덩이가 고요하게 괸 적이 있던가?

세상 숨은 듯이 사는 곳이기에 먼 곳, 바깥세상의 친한 사람들의 기별이 더한층 크게 울릴 적마다, 내 마음에 메아리치는 그 울림이 소스라칠 적마다, 내가 여기 웅덩이 짙푸른 물가에 죽치고 앉은 보람은 뭐였을까?

하지만 온 개울이 다 석간일 수는 없다.

이끼 슨 바위 벼랑 틈틈이 창포가 문득문득 무리지어서 우거진 그 언저리, 개울은 제법 깊은 골물이 된다. 그런데도 그 속, 물 바닥을 거울 들여다 보 듯 한다. 세모래 밭에는 지렁이며 잠자리 애벌레들이 기어 다닌, 자국이 선명하다. 아가자기 서로 얽히다가는, 서로 몰라보는 듯이 외돌아지는 몇 가닥의 줄무늬들!

함께 어울리자면 얼마큼은 거리가 있어야 하고, 상거(相距)를 웬만큼 둔 이상은 그 여세로 서로 손 잡아야 한다는 그 선문(線紋)들의 이치!

사람과 사람 사이, 일과 사람 사이도 그랬으면 싶다.

도시 한바닥에 멀리 두고 온 친지들, 친구들 그리고 식솔들과 나 사이에 나는 저 물 바닥의 줄무늬를 닮은 어떤 연줄을 지키고 있는 걸까?

궁금하다. 내려가는 길로 나는 그들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 것이다.

초의 선사는 차를 말하면서 ‘수진水眞’이라고 했겠다!

차야말로 물의 진수眞髓라고 일깨워준 걸까?

아니면, 차 다리기에 어울리는 물은 참이라야 한다는 뜻일까? 차를 만나서 물은 비로소 참다운 물이 된다고 한 걸까? 진수眞水가 된다고 하면 어떨까 싶다. 물이 참이고 진실이라니? 뭔가 까다로운 뜻이 있을 것 같다. 잘 모르긴 해도 ‘수진’을 물의 진정眞淨이라면 어떨까 싶다.

참되어서 맑고 맑아서 참된 마음의 경지!

산골 개울은 그렇게 흐르는 것이라고 선사는 화두를 뗀 걸까? 산골 물로 차를 달이면 물의 참됨을 누리게 된다고 넌지시 풍긴 것일까?

그걸 가리기는 내게는 힘겹다.

개울 바닥에 내리 선다.

물에 손을 담근다. 우선 이마를 물기로 적신다. 차갑다. 시원하다.

그리곤 두 손바닥에 나는 내 나름으로 진수를 받아서 마신다.

‘홀짝!’

마음에도 진수가 흐르게 해야 할 테지만 그건 내게 쉬울 수는 없다.

나로서는 다만 입술 축이고 목 안 적시는 걸로 고작이다. 그게 나의 진수 찾기, 진수 구하기다. 오늘도 바야흐로 해거름 때, 목을 적시다만 나의 진수 떠가서 차 한 잔 달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전 서강대, 인제대 교수, 계명대석좌교수

저서 ≪노을진 메아리≫ ≪왜사냐면 울지요≫ ≪한국민속과 문학연구≫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