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경주

 

                                                                               고봉진

어릴 때는 아버지의 전근이 잦아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며 자랐다.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1년에 한 번 이상 전학을 한 적도 있었다. 우리가 경주로 이사를 간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다른 지방도시에서 이삿짐 차로 경주에 도착했을 때는 추운 겨울 세밑이었다. 멀리서 시가지가 보이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은 시 서쪽 외곽으로 여기저기 서있는 작은 산처럼 생긴 커다란 봉분들의 무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피장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고분은 방치 상태에 있었다. 봉분 위에 나무가 몇 그루씩 자라고 있는 것도 있었고, 주변에는 흔히 작은 대나무나 갈대가 군생하고 있었다. 가까이 민가가 들어서 있어서, 사람들이 멋대로 오르내리고, 소나 염소 같은 가축까지 방목하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덤이라는 것을 모르고, 규모가 좀 작은 산이나 언덕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야 어른들 말씀으로 그것이 신라시대의 왕이나 왕후들의 능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봉분 중에서 제일 큰 것을 ‘봉황대’라고 불렀는데, 아이들이 그 위에 올라가 찬바람 속에 서서 연을 날렸다.

봄이 오자 외조부께서 우리를 보러 오셨다. 외가가 있던 상주에서 경주는 그 때만해도 먼 길이었다. 경주가 초행이라 꽤 여러 날을 머무시면서 이곳저곳 구경을 다니셨는데 대체로 내가 동행을 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라 하교시간이 형보다도 빨랐기 때문이었다. 외가가 경주 김 씨라서 그랬는지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시조 김알지가 태어났다는 계림이었다. 외조부는 숲 속에 있는 비각 속의 비문을 읽고 한참 동안 서서 눈물을 흘리셨다. 어려서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지만, 덩달아 가슴이 조여 오는 것 같은 슬픔을 느꼈던 기억이 남아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추이사금의 능에도 들려 한참을 머물렀다. 김알지의 7대손으로 김 씨로는 처음으로 신라의 왕위에 오른 분의 능인데 소나무 숲과 대나무 생 울타리로 둘러져 있었지만, 지금처럼 대릉원도 조성되지 않았었고, 능 둘레에 개별적인 담도 쳐져 있지 않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며칠 뒤 외조부와 불국사와 석굴암도 다녀왔다. 아침부터 길을 나섰으니 일요일이거나 무슨 공휴일이었을 것이다. 불국사에는 청운교 백운교 바로 앞마당까지 기념품과 음식을 파는 난전이 서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마당 한 구석에 지프차를 몰고 온 미군 몇이 모닥불을 피우고 점심식사인지 바비큐를 하고 있었다. 석굴암까지는 10리가 채 못 되는 거리지만 가파른 산길을 1시간 정도 도보로 올라야 했다. 봉분 형태로 되어 있던 석굴암 바로 앞까지 길이 나 있었고, 아치형으로 된 출입구가 양 기둥 옆에 금강역사의 조각을 하나씩 두고 아무런 가림 막도 없이 서 있었다.

그 해 학교에서 봄 소풍을 김유신 묘로 갔다. 가는 길에 태종 무열왕릉도 들렸었다.

“1천년 옛 서울, 빛나는 거리에, 금빛 흙 뚫고서 자라는 싹들 ― ”

학교교가를 큰 소리로 생기 넘치게 부르며 행진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찾아 간 곳이 모두 무덤들이었다.

1년이 채 못 되게 경주에 사는 동안 일요일에는 한 반 친구들과 도시락을 준비해서 고적 답사를 자주 했다. 한 번은 소금강산 자락에 있는 석탈해왕릉을 갔었다.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묘역으로 들어가자, 우리들의 큰 형뻘이나 되어 보이는 당시 중학교 4,5학년쯤 되는 학생 하나가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서서, 한 구석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두 여학생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꼬마들이 나타나자 머쓱한 표정을 하고 당황하는 듯 했다. 우리들도 어쩐지 무안한 생각이 들어 서둘러 그곳을 떠나 백율사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 막연하게나마 젊은 연인들이 좋아하는 밀회 장소의 하나가 뜻밖에 한적한 묘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는 죽음 같은 것은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자랐지만, 공동묘지를 지나거나 가끔 상여 같은 것을 만나면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몹시 무서웠다. 자신의 죽음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고,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면 어쩌나 하는 공포에 가까운 심정을 맛보곤 했다. 그래서 생로병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궁성을 떠났다는 석가의 출가 이야기를 친구의 누나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는 그의 비장한 결의에 깊이 공감했었다.

그 무렵 경주 박물관은 시내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단층으로 된 낡은 목조 전통양식의 기와집이었다. 금관 같은 볼거리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우리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나지막한 단칸 종루 안에 걸려 있던 봉덕사종이었다. 속칭 에밀레종이란 이름에 따르는 설화 때문에 그 종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종을 치면 길게 이어지는 여음이 가끔은 정말 “에밀레! 에밀레!” 하고 엄마를 부르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뜰 한 구석에 서 있던 이차돈의 죽음을 새긴 비석도 갈 때마다 찾아보았다. 머리가 잘려 달아난 목에서 흰 핏줄기가 솟아나는 광경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귀중한 석가의 가르침을 믿고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죽음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해 가을 경주를 떠나 온 후 여러 번 경주를 다시 찾았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자손이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경주는 많은 변화를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보고 느꼈던 것들이 기억 속에 아주 소중하게 남아 있어, 어떤 변화도 별로 반갑지 않았다.

지난 해 초여름 처음 한국 관광을 온 외국인과 동행이 되어 다시 경주엘 갔었다. 첨성대를 둘러 나오다 보니, 북서 방향으로 새 풀이 자라 연한 연둣빛으로 물들어 있는 고분들의 무리가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바라보였다. 순간, “아!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불만스러웠던 경주의 변화였지만 고분들의 주위를 말끔히 다듬은 것은 그래도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