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세 잔치

 

                                                                                     金菊子

2008년(戊子) 1월 2일 새벽12시20분 어머니는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역사적으로 보면 1910년 한일합방 하던 해에 세상에 태어나서 일본 식민지 시대를 거쳐, 8.15해방을 맞았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4.19혁명, 5.16쿠데타 그리고 군사정권을 거쳐, 문민정부로 세상이 바뀌는 한국 근세사를 살아오신 분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건과는 아무 상관없이 튼튼한 팔로 가족을 붙들고 파란 만장한 세파를 헤치며 향년 99세를 살아오셨다.

의사와 간호사는 침착하게 절차를 밟아서 앰뷸런스로 어머니를 큰 병원 영안실로 옮겼다. 영안실은 깨끗하고 넓었다. 곱게 차려입고 찍으신 영정사진을 영안실 중앙 단상에 올려놓고 양 옆을 꽃으로 장식했다.

화환이 줄을 이어 들어오고 친척들이 모여 들었다. 눈물을 속으로 삼키고 두 손만 마주잡았다. 검은 옷에 흰 와이셔츠 검은 넥타이를 맨 상제들이 흰꽃 속에 서 있다.

조문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흰 국화꽃을 들고 단상으로 가서 올려놓고 향을 피운 다음 절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묵념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상제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으로 보였다.

주방에서는 손님 맞을 준비로 바빴다. 메뉴는 간단하게 선택할 수가 있었다. 국은 육개장이나 북엇국이고 반찬은 북어조림, 고추 멸치볶음, 제육, 떡, 마른안주 그리고 과일과 음료수를 준비했다. 영안실 도우미들은 선수들이었다. 여섯 명이 팀이 되어 순서에 따라 기능 적으로 일을 했다.

“꼭 진지를 드시고 가세요. 돌아가신 어머니는 손님이 오면 꼭 밥을 먹여 보내신 분입니다.”

상제의 간곡한 부탁에 대부분 식사를 하고 가셨다. 식장은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슬픔보다 불효일지모르지만 축제분위기로 갔다.

“조금 떠들어도 되니?

“괜찮아, 어머니는 손님오시는 것을 좋아하신 분이셨어 ”

가족마다 각자의 손님을 안내하며 위로의 인사를 받는 모습이 잔치 기분마저 들었다.

새해 정월 초이틀에 돌아가셨으니 신년 인사를 하는 모임 분위기 같았다. 남편 직장 동료들은 퇴직한 사람도 있고 현직에 있는 사람도 있어 이곳에서 그간 격조했던 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내온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을 하기위해서 가족은 지하로 내려갔다. 넓은 유리 사이로 어머니는 하얀 포를 쓰고 누워계셨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 눈물이 되어 흘러 내렸다.

염은 세 사람이 했다. 그 절차가 엄숙하고 절도가 있었다. 아래부터 수의를 입히기 시작하여 위로 올라오면서 얼굴만 남겼다. 이제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 절차만 남긴 것이다.

수의는 30년 전 만들어 둔 것이다. 윤년 윤달에 동대문 시장에서 베를 끊어다 옷집에 가서 하루 안에 만들어야만 했다. 30년을 보관했는데 그 당시 그대로 좀도 안 먹고 깨끗했다. 옛 선조들이 베를 수의로 선택한 지혜가 놀랍다. 수의를 만들어온 날 어머니는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으셨다. 실은 남편의 권유로 할 수 없이 만들었지만 그 당시 나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수의를 만들어 놓아야 오래 산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은 매사에 준비하라는 뜻인 것 같다. 오늘 이렇게 어머니께 입혀드리게 되었으니 왠지 내 마음 속에 효도를 한 것 같은 심정이 들었다. 가족은 차례로 마지막 고인의 모습을 보면서 오열했고 어머니는 관속으로 들어가셨다.

발인發靷날 아침, 어머니 운구차가 출발하고 대형버스, 소형버스에 오르지 못한 문상객은 각자의 차를 몰고 장지를 향했다. 장지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어머니가 사셨던 곳이다. 그곳에 윗대어른과 아버님이 묻혀있는 선산이 있다.

몇 년 전부터 남편은 선산의 조상님들의 산소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윗대 산소의 사초를 하고 그 하단에 층층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산소 자리를 마련했다. 中자돌림의 자리, 善자돌림의 자리 그리고 손자 淳자 돌림의 자리까지 마련 해 놓았다. 산소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광산 숭모원光山崇慕園이라고 새긴 큰 돌을 세우고 후손들이 와서 쉴 수 있는 영모정永慕亭이라는 작은 정자도 만들었다. 그리고 정자아래에는 광산가교光山家敎를 돌에 새겨 놓았다.

光 山 家 敎

善은 善을 낳고

좋은 本은 좋은 本으로 이어진다.

아들은 아비를 닮고

며느리는 시어미를 닮는다.

어버이로부터, 아들 며느리, 손자로 이어지는

慈愛와 訓育.

子孫으로부터 父母, 祖先으로 向하는

尊敬과 孝誠의 아름다음이

善業輪廻로 이어지는 家風은

子子孫孫 永遠하리.

광산 김 씨 사계자손으로써 조상님을 숭모하며 부모님께 효도하는 바른 마음을 가져야된다는 뜻이 있는 글은 전 한국방송공사 보도 본부장이셨던 이석희 선생의 도움으로 지어졌다. 남편도 아마 오늘을 위해서 그리 준비 했던 것 같다.

광산 숭모원에 영구차가 들어섰다. 영모정 뜰에 운구를 내려놓고 병풍을 치고 자손들이 제사를 지냈다. 하관 시간이 오전 10시부터 11시 사이에 좋다고 하여 천천히 여유 있게 운구를 옮겨 아버님 이 묻혀 계신 곳으로 옮겨졌다. 40여년 만에 부부가 만나시는 순간이었다.

산소 자리는 중장비가 이미 동원되어 땅을 파놓았다. 흙은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겨울 날씨치고 맑고 햇빛이 좋았다. 어머니가 이제 땅 속으로 묻히시는 것이다. 식구 들은 오열했다. 하관은 엄숙했고 남편은 땅속에 내려놓는 관을 꼼꼼히 반듯하게 챙겼다. 그의 성품이 발동한 것이다. 식구대로 흙을 한 삽씩 퍼서 관을 덮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중장비로 흙을 다지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만감이 교차 되었다.

99세白壽로 세상을 떠나시는 어머니!

연세로 보면 여한이 없다. 친정어머니하고 26년 살았지만 시어머니하고 함께한 세월은 40여년이 넘는다. 그동안 좋은 일도 많았고 힘든 일도 참 많았다. 그런데 그 힘들었던 일이 나의 삶을 밀어 주고 지탱해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힘든 일이, 어려운 시련이 오히려 나의 삶을 이끌어 주었던 것임을 이제와 깨닫게 되었다.

허리가 반이나 굽으신 고향 동네 어른들이 내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그간 참 수고가 많았지? 하셨다. 평소에 어머니를 잘 알고 지내시던 분들이다. 남편이 효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 부모가 오래 살아주는 것도 자손들에게는 참 좋은 일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주위 분들에게 효자라는 소리도 듣고 칭찬을 해주니 말이다. 친정어머니는 지금부터 20년 전 66세로 돌아 가셨다. 자식들을 길러주시고 보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이렇게 천수를 하시며 자손들에게 효도할 기회도 주시고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인생을 살아 여한 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십여 년 전 이미 본인의 옷가지며 보석 종류는 정리 하셔서 장롱설합이 텅 비었고 외출복 한두 벌과 일상복 몇 벌 뿐 아무 것도 없으셨다.

자손들이 허둥댐 없이 장례준비를 할 시간도 충분히 주셨다. 비록 알아보시지는 못했지만 보고 싶은 사람들도 다 보시고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인생을 마감하셨다.

산소 아래 잔디밭에는 음식상이 차려 졌다. 문상객들은 이미 식사를 시작 했고 장국밥, 돼지고기 편육에 막걸리 잔이 돌아가고 있었다.

시집와서 첫해에 어머니 육순 찬치를 치렀다. 다음해는 신흥사에서 장구 치며 환갑잔치를 벌렸고 칠순잔치는 고향 마을 냇가에서 돼지를 잡는 동네잔치를 했다. 그리고 팔순, 구순은 호텔에서 차렸다. 그리고 해마다 돌아오는 생신은 집안에서 대소가 식구들이 모여 축하연을 했다. 나는 어머니 생신을 치르면 그해는 다 간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오늘 이곳에서 어머니 99세의 마지막 잔치를 치르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 영면(永眠) 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