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문인의 자취

 

                                                                                      유영애

의 절기에 맞추어 소설 ‘설국’의 무대였던 일본 니이가다 현으로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문인협회의 배려로 우리 일행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하였다는 숙소에 묵게 되어 감회가 깊었다. 나는 일본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작가의 발자취를 보며, 그에 버금하는 우리의 시선詩仙 미당선생이 사시던 자택이 자꾸 떠올랐다.

작품 ‘설국’의 배경이 된 니이가다 현의 에치고 유자와 온천 마을은 아직도 문명과는 거리가 느껴지는 한적한 산촌이지만, 마을 구석구석이 작가의 혼과 숨결로 가득함을 볼 수 있었다. 거리는 물론 작은 가게 안에서도 ‘설국’과 관련된 글과 그림이 쉽게 눈에 띄어 그 고장 전체가 작가의 문학과 호흡을 함께 하는 듯하였다. 이곳은 작가가 태어난 곳도 아니고 오래토록 묵었던 곳도 아니다. 큰 눈이 내리면 기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여서 불편한 점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고장이 작품 속의 주요 무대라는 것에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잘 가꾸어 나가고 있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머물면서 글을 썼다는 숙소에는 그의 애장품과 일상 용품들이 체계적으로 잘 보관되어 있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의 자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집필하던 원고, 탈고를 거듭한 종이 뭉치들, 하까다와 유까다 같은 평소의 옷가지들, 심지어는 그가 즐겨 신고 눈밭을 걸었다는 게다(나막신)까지도 보관되어 있는 등, 그가 쓰던 작은 소지품까지 소홀함 없이 보전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지척에 있는 역사 민속 자료관에도 별도의 ‘설국관’이 자리하고 있어 작가에 대한 그들의 관심과 애정을 엿볼 수 있었다.

작가가 잠시 머물었던 자리도 그처럼 정성껏 가꾸고 보존하는 그들의 높은 문화의식은 본 받을만한 것이었다. 특히 어린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소설의 무대를 실감 있게 꾸며 놓은 것을 보면서 그들의 관심과 열정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나는 삼일 동안 느긋하게 이곳을 돌아보고, 또 흑백으로 찍은 영화 ‘설국’을 보면서 내내 미당 선생을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다. 정치적인 이유로 고인에 대한 인간적인 위상과 함께, 그 분의 시혼이 잊혀져가고 있는 우리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와 문화의식에 실망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남현동에서 이십여 년 간 미당 선생님과 담장사이로 나란히 삼이웃하며 살았다. 그 내외분은 정이 많고 친절하여 시골 인심 나누듯 정을 주시며 우리를 살갑게 대해주셨다. 또한 그분들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택가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학교담장을 넘어 마을까지 들려오곤 했다. 주민들은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시끄러워 견딜 수 없다며 학교 담장을 더 높이 쌓아 달라고 연판장을 돌린 일이 있었다. 그때 온 동네 사람들은 모두 서명을 하였다. 그러나 미당선생은 ‘아이소리가 나지 않는 동네는 산새 없는 산과 같다’며 홀로 반대를 하셨다.

그 분의 생애 중 가장 오랜 기간 기거하시면서 주옥같은 시의 산실이었던 ‘봉산산방蓬蒜山房’은 선생이 돌아가시자 집장사에게 넘겨졌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술인들이 미당의 집은 보호 되어야 한다며 항의를 하자 나라에서 부랴부랴 사들였다. 그리고 곧 기념관을 만들겠다고 하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친일파라는 이유 때문에 제동이 걸렸다. 당국은 여론에 밀려 우산 장수와 나막신 장수처럼 이 눈치 저 눈치 살피더니 어느 날 대문에 대못 질을 해버렸다.

나는 아들이 그 곳에 살고 있어 지금도 자주 남현동 옛집을 둘러보게 된다. 앞 뒤 집이라 거울처럼 빤히 보이는 덩그런 시선詩仙의 집, 뜰에는 소인 없는 엽서 뭉치마냥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시상의 원천이 되어 주었을 정원의 나무들은 가꾸지 않고 버려두어 잡목처럼 뒤엉키고 사람이 살지 않아 퇴락할 대로 퇴락한 빈 집은 도둑고양이들의 서식처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골치 거리가 되고 있는 이 집을 누가 근대시의 효시였던 우리 미당 선생의 자택이었다고 하겠는가.

국민의 애송시가 되고 있는 ‘국화 옆에서’의 시인 서정주, 몇 차례 노벨상 후보로까지 거론 되었고, 일상의 말씀 하나하나가 시어였던 분, 이 분은 우리의 긍지이며 자존심이었다. 비록 만년에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해도 그 분의 빛나는 시편과 높은 문학정신은 대접을 받아야한다고 생각된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배고픈 문인들을 대접하느라 늘 동동 걸음 치시던 부인의 모습도 새록새록 하다. ‘봉산산방’에서 학처럼 고고하게 사신 모습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나는 두 문인의 사후를 비교하면서 일본과 우리의 문화에 대한 인식과 수준을 생각하게 된다. 한 나라의 정치는 흥망성쇠를 반복하지만 민족이 가꾸는 문화는 그 민족의 정신과 함께 영원히 지켜진다고 생각한다. 선생의 고향에 기념관이 세워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가장 오래도록 기거하면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셨던 봉산산방을 방치한 것은 우리 문화의식의 현주소가 어디쯤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문학공간≫으로 등단(1997년), ≪현대시조≫로 시조 천료. (2000년)

여성시조문학회 감사. 에세이문학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