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

 

이효석

낙엽을 태우면서

 

■일 시 : 2008년 2월 16일

■장 소 : 수필문우회 회의실

■참석인원 : 17명

■사 회 : 이태동

■정 리 : 이경은

 

<본문>

 

낙엽을 태우면서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덧 날고 떨어져서 또 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삼십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언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쟁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연돌煙突의 붉은 빛난 남기고 집 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지릅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 없는 그 넓은 잎이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 속에 묻혀지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쪽쪽 그 뒷시중을 해야 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의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 타는 냄새 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가제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올린다. 음영陰影과 윤택潤澤과 색채色彩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헌출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매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시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바라지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 죽어버린 꿈의 시체를 - 땅 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이다.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로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어린 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 같다.

얼굴을 붉게 데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내 꼴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막 받았을 때의 그 태고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새삼스럽게 마음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비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겼다는 듯이 동화童話의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다. 늘 들어가는 집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속에서 천국을 구경하는 것이 아닐까.

물과 불과 - 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원소 의 즐거운 인상 위에 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되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색전기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些事에 창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 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사회 : 안녕하십니까? 이제부터 <계간수필> 제 52회, 2008년 여름 호를 위한 합평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합평 작품은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입니다.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고 짧은 글이지만 주제에 ‘생활인의 철학’이 담겨 있고, 글을 쓸 때에는 단단한 주제 의식을 갖고 쓰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지정토론자로 김소경, 최순희, 김형진 선생님 세 분을 모셨습니다. 먼저 작가의 연보에 대하여 김소경 선생께서 간략하게 정리해 주시겠습니다.

김소경 : 이효석 선생은 호가 가산(可山)으로 1907년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고향에서 평창공업 보통 학교를 우등생으로 6년 과정을 마치고,

14세에 경성으로 와서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고, 여기에서 현민 유진오를 만나게 됩니다. 이효석과 유진오는 수재로 알려졌고, 두 사람은 산문과 시를 창작하면서 우정을 맺습니다.

’30년에 경성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서 보름쯤 근무를 하나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못 견뎌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함경북도의 경성 농업학교에서 3 년간 영어교사를 지냈는데,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지만 오로지 창작에만 몰두합니다.

이 시절 나진고등여학교 출신인 이경원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둡니다. 그의 나이 30세인 '34년 평양 숭실 전문학교 교수를 하면서 생활이 조금 나아지나, '40년에 아내를 잃고 뒤이어 차남을 잃는 불행을 겪습니다. 이에 상심을 하여 만주 등지를 방황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42년에 뇌막염으로 36세의 생을 마감한 요절 작가입니다.

그는 ’25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봄>이 선외가작이 되고, 이어 ’28년에 <조선지광>에 <도시와 유령> 발표 후 본격적으로 문예활동을 시작합니다. 이후 ’30년까지 <노령근해>, <상륙>, <북극사신>등 경향문학의 성격을 띤 작품들을 발표하며 동반자 작가同伴者 作家로 활동합니다.

그러다 ’32년에 <오리온과 능금>을 발표하면서 순수문학으로 전환하여 <구인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순수문학 계열에 합류합니다. 이때에 발표된 작품으로는 <돈(豚)>,<수탉>등이 있습니다.

이후 ’36년부터 ’40년까지가 그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밀 꽃 필 무렵>, <분녀>, <개살구>, <산>, <들>, <석류>등의 주옥같은 단편들과 중편 <장미 병들다>, 장편 <화분>, <벽공무한>등이 연이어 발표되면서 그의 작가로서의 역량이 마음껏 발휘됩니다.

수필은 <낙엽을 태우면서>, <청포도 사랑>, <수선화>, <녹음의 향기>, <화초>, <낙랑방랑기>, <이등변 삼각형의 경우>를 비롯한 약 40여 편이 있습니다.

사회 :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최순희 선생께서 이효석의 작품론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최순희 : 이효석 하면 <낙엽을 태우면서>가 생각나고, 갓 볶아낸 커피 냄새가 나는 이미지로 저에게 떠오릅니다. 저는 마당이 없는 집에서 태어나 한 번도 낙엽을 태워보지 못한 게 아쉬웠는데, 사실 이 작품이 고등학교 때에 교과서에 나왔을 때 조금 시시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작년 ‘탄생 100주년’에 새로 나온 산문집을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제가 왜 그렇게 시시하게 생각했었나 싶었습니다. 문장도 좋고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이 분은 일상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상상을 하면서 일상에서 창조적인 생활을 꿈꿉니다.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귀중한 진리’를 발견하는 겁니다.

그는 현실적 생활의 중요성을 깨달아, 일상의 삶을 재정비하면서 다른 사람과는 다른 철학을 내세웁니다. 보통은 가을을 감상적으로만 쓰는데, 이효석이 ‘생활의 계절’로 본 것이 새롭고, 기존의 감상의 늪에 빠진 문학을 대비시켜 일상사에 대한 관찰을 뛰어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보았습니다.

소설가라서 그런지 ‘관찰의 묘사’를 무척 중요시합니다. 김이 서린 목욕탕을 그려낸 부분에서는 사물들이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을 보면서 생활의 철학을 느끼는 데 이것이 참 긍정적으로 느껴집니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라는 부분도 아름다웠습니다.

다만 깔끔한 외모와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그가 빵과 버터 등의 음식이나, 커피, 모차르트와 쇼팽의 피아노 곡 연주, 프랑스 영화 감상을 즐겼고, 서양 화초가 가득한 붉은 벽돌집에서 생활하며 유럽 여행을 꿈꾸는 등 매우 서구적 취향을 가진 서구 지향적 모더니스트였고,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적응도 못한 시대와 무관한 탐미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일부의 평가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938년도에 이런 것들이 일상적이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일부 지식인의 경우 누릴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보편적인 한국인의 정서나 대중들의 생활, 일제시대라는 강압적인 시대상으로 볼 때 너무 사치스럽고 유리된 것이 아닌가. 또는 문화적인 선망이 맥으로 닿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에게 도덕적․윤리적인 것을 요구할 수가 없지만, 극히 한정된 부류에만 속한 것을 연상케 하는 것은 작가의 사회적 책임과는 조금 상치된 것이 아닌가요? 물론 모든 작품이 다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이효석 문학상도 있고 한데, 작가의 위상에 비해 사회적 책임이 부족한 것은 아닐 런지요.

사회 : 최순희 선생께서 주제적인 측면에서만 얘기하셨는데, 토론에 단서를 드리기 위해서 몇 마디 하겠습니다. ‘사치성’에 대해 언급을 하셨는데, 이 분은 문학에서 ‘말의 경제성’을 찾는 분입니다.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하셨습니다. 가령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 많은가보다.”는 구절은 상징적으로 인생을 얘기한 것이죠. 역사의 진행 과정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사람을 희생하는 과정을 얘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화단의 뒷바라지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된다.” 같은 데에서는 절대로 감상적이지 않으려 합니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물과 불’의 이야기들은 최 선생님이 말하신 사치라기보다는 불과의 싸움에서 느끼는 향기를 얘기한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의 크리스마스 같은 묘사도 시각을 다르게 보면, 겨울에 트리가 없고 스키가 없으면 얼마나 황량할까 싶다는 거죠. 결국은 창조의 문제입니다.

이제 마지막 지정토론자인 김형진 선생께서 이효석에 대해 종합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김형진 : 이태동 선생과 최순희 선생께서 각기 다른 의견을 내놓으셨는데, 문학 작품은 어떻게 다가가느냐에 따라 시각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효석은 천재적인 작가이지만 심약한 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젊었을 때는 경향파의 작품을 쓰다가, 생활이 안정되면서 순수문학에 눈을 뜨고, 구인회에 가입했다가 다시 탈퇴하고, 부인이 돌아가신 뒤엔 만주 쪽에서 방황하다가 병에 걸리다든가 하는 것은 그가 강한 의지라기보다는 그때그때마다 바뀐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직접 뵌 분의 얘기에 따르면 몸도 약간 약하셨다고 합니다.

작품에서도 그런 것이 보여 집니다. 수필 <화춘의장(花春意匠)>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서 나와 생활에서 실제로 꽃을 캐다가 심었으며, 꽃의 아름다움을 즐겨야 한다’ 했는데 실생활도 그렇게 했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수필 <이등변삼각형의 경우>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뿐 취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얘기합니다.

최순희 : 어떤 글에서 보니까 자기는 꽃을 좋아하는데, 뜰이 있더라도 아까워서 꺾어서는 보지 않고 사다 보았다고 합니다.

사회 : 작품 그 자체로만으로 연구하고 이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형진 : 저도 작가와 작품과 배경을 분리해야 한다는데 동감을 하는데, 이 분의 생애와 작품을 비교해 보니까 그런 것이 나오더라는 겁니다.

사회 : 그것이 영향이 없을 수는 없지요. 이 분이 공부하던 시대가 모더니즘이 서구에서 굉장히 활발하게 꽃이 피고 읽히던 때라 리얼리즘의 사회 저항적, 역사의식은 별로 노출이 안됐죠. 그래서 이 분이 그런 면에서는 평가를 못 받았습니다만, 우리 문학사에서 <메밀꽃 필 무렵>은 최고의 서정성이 있는 작품입니다.

김형진 : ’28년에 발표한 <도시와 유령>은 경향파 성향의 작품이고 ’32년 이후 발표한 작품은 순수문학파 성향입니다.

사회 : 우리가 20대에 ‘경향’ 쪽에 관심을 안 갖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게 바람이 조금 지나가면 삶을 관조하고 미학적으로 인식이 소통되는 거죠.

김형진 :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심지가 굳은 분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28년 이 분의 초기 작품을 발표하던 그 시대의 특색은 경향파나 민족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데에 비해, ’30년대에 들어오면서 순수문학이 강해지고, 1935년 KARF가 강제로 해산되면서 이 분은 ‘구인회’에서도 떠납니다. 이건 제가 짜 맞춘 건지는 몰라도 말입니다. 선생은 타고 나길 순수문학파이지 경향파 쪽에는 어울리지 않는 분 같긴 합니다만.

김소경 : 이 분은 항상 온화한 말로 사람을 대했고 의지가 굳고 개성이 강한 품성을 가졌다고 합니다. 사람마다 다 양면성이 있잖아요. 요절을 한 천재니까 성격이 보통 사람과는 틀리지 않았을까요? 선생은 집안이 어려워도 잘 차려입고 다녔다는데, 약간 자기 밖에 모르는 에고적인 면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36세 밖에 못 산 천재작가니까 저는 이 분의 성격과 생활은 비판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작품에만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습니다.

사회 : 네. 저도 작품만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자유토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김병권 : 저는 최순희 선생의 얘기에 동감합니다. 현실을 준비하면서 의미 있는 생을 이끌어간 것이 좋았습니다. 문장은 지금 시각으로 봐서는 좀 미흡한 점도 있지만, 1930년에 쓴 작품이라면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봉평 출신이라 이 분에 관한 작품 외적인 얘기는 많습니다만…….

엄정식 : 지난주까지 시골에서 낙엽을 태우다 왔는데, 참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렇게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표현법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덜 세련됐지만, 발상과 구성, 주제 의식이 뚜렷합니다.

김선화 : 멋있는 글을 썼고, 가을의 낙엽을 태우면서 쓸쓸함을 초월해서 철학의 깊이로 들어가서 오히려 열정적이어야 한다고 표현한 부분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김영만 : 이 글을 읽으면서 요즈음 쓰고 있는 신변잡기식의 무미한 수필들은 옛날의 이런 수필에 비해 너무 초라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 작품은 많은 상념을 느끼게 하고 ‘국민 수필’로 불렸는데, 최순희 선생께서 고등학교 때에 읽을 때 시시했다고 하셨는데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편이 다 실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번에 전편이 다 실린 글이라서 좋았습니다.

앞에서 김형진 선생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작품과 인간은 같이 놓고서 보기는 어렵다.”고 했는데, 소설은 몰라도 수필의 경우에 있어서 과연 ‘인간과 작품’을 떼어놓고 볼 수 있겠나 싶습니다. 다른 장르와 달라서 말입니다.

또 이 분이 총독부 문예 검열계에 잠깐 취직을 했을 때 동료 문인들의 작품을 검열했는데,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받아 그만두긴 했지만 그 점이 김형진 선생의 말씀에 이어서 조금 걸리는 대목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회 :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연기 냄새가 왜 그렇게 좋은가, 저는 ‘불(火)’과 끝까지 치열하게 부딪칠 때 오는 ‘보이지 않는 쾌감’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너무 의미확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최 선생님 더 말씀 하시겠습니까?

순희 : 제가 아까 사치스럽다는 표현을 썼는데요. 저는 산문집 전체를 통틀어서 관통하는 기운이 있는데, 저는 그것을 사치스럽다기보다는 어떤 ‘호사스러움’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이 호사스러움은 나쁜 뜻이 아니라, 한 마디로 ‘여유’라고나 할까요. 상당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그 당시가 식민지시대니까 거기에 대해서 억압받고 눌린 것이 있을 텐데, 이 분의 산문세계에 나타난 것은 ‘암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담백하고 아름답고 여유로움’을 추구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이건 부정적인 것보다는 여백, 마음의 여유로 보입니다. 커피 냄새를 통해서라도 어떤 아우라를 향유해 보려는 정신적인 여유 같은 게 아닐까요?

최병호 : 이효석은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땅 속 깊이 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 일이 바로 손수 목욕물을 긷고, 나르고, 불을 피우고 했습니다. 마치 이를 지상의 천국처럼 생각하면서 이야기 속의 소년처럼 용감해져야 한다고 하고, 동화의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몸을 담근다는 거죠.

또 백화점에서 커피와 빵을 사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며 오는 것을 ‘어린애답다’고 말하고,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색전기를 장식하는 일 등이 엄연한 일상생활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는 생각에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결미에서 책상 앞에 앉아서 ‘사사(些事)에 창조적인 뜻을 발견한다.’라고 했는데, 과연 글 앞 부문에서 생활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한 세 가지 조그만 일들이 얼마나 창조적인 것으로 연결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회 : 제가 보기에는 상당히 문학적인 표현이에요. 우선 소년은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그런 용감한 생활을 하고 부끄럽지 않은 점을 겸손하게 표현하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요. 어린아이는 딴 생각을 안 하기에 순수하게 기쁨을 느끼고, 삶의 정수를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느끼니까요.

최병호 : 사회자께서 부질없는 말은 한 마디도 안했다고 하셨는데, 첫 페이지에 보면 “제일 귀찮은 것이 담쟁이다… 그 뒷시중을 해야 한다.”에서 그 뒷시중을 해야 하는 이유는 빼버려야 오히려 좋을 것 같습니다.

사회 : 아니죠. 그러면 부자연스럽습니다.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는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정당하다.”라고 했고, 윌리엄 브레이크 (William Blake)같은 사람은 “악도 필요하고 선도 필요하다.”고 했거든요. 있어야 합니다. 인간 세상의 정원의 여러 가지 존재 개체를 상징할 때 한 쪽만 묘사한다면 에덴동산은 되겠지만, 글쎄요.

김채은 : 저는 이십 년 만에 다시 읽으면서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생명력을 가지고 사랑을 받는 수필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글에서 ‘생활’이란 말이 열두 번 나옵니다. 이렇게 그 말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31살에 쓴 글인데, 어떻게 그 나이에 이런 글을 썼을까. 이 분이 예술가이고 타고난 천부적인 재능이 없고서야 이렇게 아름답고 모던한 글은 못썼을 것 같아요. 그런데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왜 그렇게 생활이란 말을 많이 썼을까 싶었습니다.

자기의 이상과 책임, 눈앞에 닥친 일속에서 뭔가 미학적인 것을 찾아내서 이렇게 표현해 낸 것을 보고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더러 젊은이의 치기도 보이지만 읽으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정진권 : 저는 지난 연말까지 단독주택에 살아서 늘 낙엽을 태웠는데, 낙엽 타는 냄새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저는 커피를 안 마시기 때문에 커피 냄새는 잘 모르지만 낙엽 타는 냄새는 구수하기도 하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낙엽 태울 때 마른 잔가지를 태우면 불길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어요. 이효석 선생처럼 맹렬한 생활의 의욕까지는 못 가져도 낙엽이 타오르는 것을 보며 ‘내가 살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때로 손자들이라도 와서 고구마라도 구우면 사는 재미마저 느껴집니다. 공감이 갑니다.

그런데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라는 대목은 아무래도 과장인 것 같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가르칠 때 단어나 문장상의 결함을 못 느꼈는데, 지금에 와 보니 결함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로 보면 양해가 됩니다. 이 글의 내용에는 ‘소년 취미’와 ‘유아 취미’가 약간 엿보입니다.

홍혜랑 : 결미 부분의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그런 생활적 些事에 창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하고 자문을 했는데, 저는 이 분은 쓰지는 않았지만 왜 그랬는지 스스로 알았을 것 같은 데요. 왜냐하면 ‘궁싯거리고’는 ‘관념의 논리’이거든요. 그런데 낙엽을 태우면서 그 맡는 냄새에서 강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낀다는 것은 감각이란 말입니다. 아까 목욕탕에 대해 이태동 교수님께서는 ‘상징적’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어요. 이 낙엽의 냄새는 후각이고, 불을 데워 따뜻한 목욕물에 들어가는 것은 촉각적 감각이죠.

낙엽을 태우면서 아무리 궁싯거려도 작가는, 이 분뿐만이 아니라 저희 모두가 정말 원고지를 메우는 이 순간이 행복한 건가, 아니면 따뜻한 목욕물에 들어가서 자욱한 연기 속에 있는 것이 더 행복한 감각인가를 생각합니다.

삶의 기왕 주어진 시간이 제한적이라면 이런 감각적인 것을 떼어놓고 ‘이것은 우리가 안 가는 길이야.’라고 한다면 손해 볼 것 같아요. 느낌과 생각에서 생각은 느낌을 못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부터는 느낌을 따라야할까 봅니다.

변해명 : 저는 이 글에서 낙엽은 그저 불꽃과 물을 이끌어내기 위한 소재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조락의 뜰에서 낙엽을 태우면서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자신을 타오르게 하는 영혼의 불꽃을 바라보게 될 때, 그 영혼의 불꽃이 타오르는 동안 몽상에 젖고 싶어 욕실 물속에 잠깁니다. 물은 자신을 감싸는 감성적인 모성으로서의 위안의 대상이지요.

“물과 불과 ― 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가을로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 원소의 즐거운 인상위에 서기 때문이다.” 라는 구절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작가는 낙엽을 태우는 행위를 통해 상상력과 언어를 끊임없이 재구축해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가스통 바슈라르(Gaston Bachelard)’는 ‘산다는 것은 생성하는 것, 순간순간마다 미래를 획득하면서 진행하는 창조의 과제’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생활은 그에게 일상이 아닌 생각을 이끌어내는 창조적인 뜻을 발견하게 하는 동기로, 그를 책상 앞에 앉게 하는 글이라고 보았습니다.

염정임 : 이렇게 좋은 작품을 합평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이 분은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분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형진 선생님께서 심약하다고 볼 수도 있겠구나 싶지만, 저는 오히려 심지가 강했던 분으로 봅니다.

유진오, 김기림이 비난을 했지만 결국은 KARF에 가입하지 않거든요. 최정희 선생과도 교분이 깊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이효석에 대해 다시 알게 되었고, 그는 분명 우리 문학에서 빛나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이응백 : 생활 속에서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가득히 담겨진다.” 와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하는 게 참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제’, 즉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는 부분은 표현의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세욱 :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경이를 느꼈습니다. 우선은 놀랐고 기뻤습니다. 첫째로, 교과서에서 읽을 때(※교과서에는 후반 부분이 없다)와 오늘 읽은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전반부는 감정적이고 주관적, 관조적인데 비해, 후반부는 ‘물과 불’을 통해 인간의 생활을 보다 지성적이고 비판적으로 심화시켰습니다.

이효석은 ‘물과 물’ 곧 새빨간 숯불과 끓는 주전자의 물로 가을을 상징했는데, 맹자는 양혜왕 하편에서 인간의 어려움을 ‘수심화열水深火熱로 표현했습니다.

극도의 연소와 극도의 고난이 공통될지 모릅니다. 이효석의 물과 불은 맹자의 그것에서 착상했을지 모릅니다. 그 당시 서구의 문풍에서도 그런 것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사회 : T.S. Eliot이 1919년 <황무지>에서 물과 불이 나오는데, 물은 성관계를, 불은 생명의 창조를 나타낸다고 하는데, 허세욱 선생님이 말씀하신 수심화열 론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효석 씨가 영문학을 했는데 이 작품을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김형진 :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회 : 그러면 오늘 합평회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열렬한 토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