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질유정八耋有情(2)

 

                                                                                                                                              蘭臺李應百

나는 1939년 4월에 경성사범京城師範에 입학하자 돈암동서 지금의 을지로乙支路 5가의 학교까지 30분간 걸어서 통학했다.

동소문 고개를 넘어 동성東星 중학을 거쳐 경성제국대학 앞을 지나려면, 풀풀 영하 15도 내지 20도가 되는 겨울에는 의정부 방면에서 아침 일찍 장작을 잔뜩 실은 달구지를 끌고 문안으로 들어오는 소의 망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눈만 빼꼼하게 보도록 털실로 짠 목출모目出帽의 코와 입 언저리에 성에가 슨다.

종로 5가 거의 간 왼쪽에 인보관隣保館이라는 이발소가 있어 그 곳을 단골로 삼았다. 안에 들어서면 흰 가운을 입은 나이 30쯤 되는 젊은이와 50이 가까운 의젓한 중년 이발사理髮師가 있었다. 그 당시 사회에서도 일어日語 상용을 권장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토박이 서울말을 썼다. 지사풍志士風이 풍기는 젊은이는 이따금 사회 정의正義로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럴 때는 목소리가 굵직하고 느리며 힘 주는 톤으로 했다. 그러다가 상기上氣가 되면 어느덧 웅변조로 변한다. 너무 격한 쪽으로 흐를 기미가 보이면 나이 지긋한 이가 슬그머니 개입介入을 해 격앙激昻의 도를 낮추기도 했다.

입학 후 며칠 뒤부터 수업 전에 응원가應援歌 연습을 연습당演習堂이라는 강당에서 행했다. 4, 5학년이 앞에 서고, 3학년 이하는 학년별로 줄을 서 되도록 소리를 크게 질러 우렁차게 부르도록 한 것이다. 가사歌詞를 다 외어 오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不問律로 돼 있다. 만약 더듬더듬하다가는 여지없이 뺨이 갈겨진다.

다음은 3․3․7 박수와 박수拍手 난타亂打 연습이다. 3․3․7 박수는 어렵지 않았으나 박수 난타가 문제였다. 3․3․7 박수를 몇 번 계속 하다가 불시不時에 “박수 난타!” 하면 사정없이 박수를 계속 해야 한다. 요새 우리나라 사람이 어머니가 도마 위에서 칼질하는 소리에서 힌트를 얻어 ‘난타’로 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그때는 박수로 난타를 한 것이다. 그때 앞 중앙에서 응원단장이 커다란 응원기를 양손에 들고 독수리가 하늘에 원을 그리듯 아래위로 빙빙 돌리다가 갑자기 멈추면, 박수 소리가 씻은 듯이 가셔야 한다. 그때 만약에 몇이라도 소낙비 뒤의 후들후들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뒤쳐져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영락없이 지적해 뺨을 몇 대씩 갈겼다. 그래 박수 난타가 시작 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갑자기 멈출 때를 대비해 헛박수를 치는 일이 생겼다. 이것을 감지感知한 리더들이 줄 사이를 돌면서 헛박수를 치는 학생을 여지없이 잡아내어 뺨 몇 대씩을 갈긴다. 이처럼 도둑과 도둑잡기의 신경전 속에 호흡이 자연스레 익으면, 그런 자자분한 기법技法을 부리지 않고 자연스레 원숙경圓熟境에 든다.

그런데 시골 태생인 나는 이렇게 아침마다 초긴장으로 10일씩이나 계속된 응원가 연습이 어느 때 쓰이는지 용도가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아침, 운동장으로 데리고 나가 ㄱ자 형으로 세우고 응원가와 박수 연습을 시켰다.

어느 날 서울 운동장으로 야구野球 응원을 갔다. 그때 응원가와 3․3․7 박수, 박수 난타가 유감없이 쓰여 의문이 풀렸다.

1학년 여름방학 직전에 기숙사생에게 시담회試膽會를 갖는다. 글자 그대로 담력膽力을 시험하는 것이다.

7월쯤 접어들어 어느 날 저녁 소등 후 1학년 전원을 기숙사 집회실로 모아놓는다. 그리고 입담 좋은 상급생이 어느 곳에 가면 마음이 오싹할 무서움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말한다. 가령, 본관 앞 묵은 연못 두어 아름드리 버드나무 그루 쪽에서는 실연失戀한 처녀 귀신이 산발하고 흰 옷 자락을 날리면서 홀연히 나타났다가 이윽고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느니 말이다.

이리하여 겁에 질릴 대로 질린 어린 1학년생들에게 돌아오는 코스를 정해 들려주고, 10분 간격으로 한 명씩 돌게 한다.

맨 처음이 병기고 뒤다. 그곳에는 사격장射擊場이 있어 과녁 쪽에 모래가 쌓여 있는데, 상급생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고 모래를 솔솔 뿌리다가 갑자기 해골이 덮치게 한다. 이과실理科室에 있는 인골 모형에 줄을 매서 늘어뜨리는 것이다.

겨울방학 중 한창 추운 1월 중순께 10일 간의 한계고寒稽古가 있다. 유도柔道, 검도劍道로 나뉘어 유도는 무도관武道館 유도부에서, 검도는 검도부에서 가졌다. 유도부는 다다미를 깔았지만 검도부는 얼음같이 찬 마루바닥이라 그 넓은 공간에 두 대 핀 난로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은 뻔하였다. 그것은 젊은 열기로 땀이 흐르게 한 것이다.

5학년 2학기에 철원鐵原 평야로 10일간의 군사강습軍事講習을 갔다. 완전무장 상태로다. 그때까지 축적된 교련과목의 총 마무리로 사범학생의 교육실습에 견줄 만큼 중요한 과정課程이다.

철원평야는 끝단 데를 모를 정도로 너르다. 그 요지要地에 군사강습용 막사幕舍를 몇 동씩 지어 놓은 상설 시설인 것이다.

강습이 거의 끝날 무렵, 야외 훈련訓練을 나갔다. 대좌大佐인 배속장교配屬將校가 “오늘은 특수훈련을 하겠다. 저 언덕 위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보이지? 저 나무를 찾아가 돌아서 이 자리로 돌아오는 거다.” 이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 나무를 향해 가다보면, 이쪽 언덕이 가려 그 소나무가 실종失踪돼 보이지 않게 된다. 그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중간 목표를 세워야 한다.”

소나무를 향해 맞바로 걸으면서 중간 목표를 세워 놓는다. 소나무가 보이지 않으면, 중간 목표를 향해 걷는다. 중간 목표도 안 보일 상황이면 또 중간 목표를 세우곤 했다. 제2의 중간 목표다. 그래야 중간 목표가 보이지 않게 돼도 제2의 중간 목표를 향해 걸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제1의 중간 목표, 제2의 제3의 중간 목표를 세워 놓고, 그것을 향해 걷다 보면 드디어 원 목표까지 도달하게 된다.

원 목표에 중간 목표를 세워 놓는 것은 실생활에 반영시켜야 할 지혜를 이 강습에서 배웠다.

나는 사범학교 예과 5년을 거쳐 본과 2학년 1학기를 마친 때 8․15 광복을 맞았기에, 전문 과정에서 자동으로 승격된 경성사범대학 학부 1학년에 진입이 됐다. 그때 비교적 漢文의 소양이 쌓여 있었으므로 관련이 가장 가까운 국문과를 택했던 것이다. 처음에 국문과라 하다가 국어과로 변경되고, 지금은 국어교육과라 한다.

그 이듬해인 1946. 10. 15에 종합대학으로 새로 출발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문학부 2학년으로 진입을 한 것이다. 1946. 9. 18에 사범대학 입학식 때 장리욱張利郁 학장은 ‘고등교육계에서의 남녀공학은 4천 년 역사를 가진 이 땅에 시초의 일이다. 서로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고 당부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대로 실행했기에 한국의 대학 과정에서 남녀공학이 일찌감치 정착이 된 것이라 자부한다.

나는 10년 반 동안에 단 2년간 기숙사 생활을 제외하고는 가정교사와 학부 3, 4학년간 중고교 시간강사(지금은 학생 신분으로는 안 되지만)를 겸했다.

1949. 7. 15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하자 9월부터 서울중(6년제) 국어과 교사로 근무하고, 6․25 후 부산 피난 시절에 1951. 9월부터 서울사대 부중고에 근무했다. 1954. 4월부터 이화여자대학에, 1957. 4월부터 1988. 8월말까지 모교인 서울대 사대에 근무하다가 정년퇴임 후, 현재는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1974년 서울대에서 문학박사文學博士 학위를 받았다. 1955. 2. 25에 한국국어교육연구회를 창립하여 1993년까지 회장, 1986년에서 1998년까지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1989년에서 현재까지 전통문화협의회 회장, 1997년에서 2003년까지 사단법인 한국어문회 이사장(현재 명예 이사장), 1999년에서 현재까지 사단법인 중봉 조헌趙憲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하고 있다.

국민훈장 동백장(1982), 교육특별공로상(대한교련 1987), 국민훈장 모란장(1988), 수필과 비평 大賞(수필과 비평사 1997) 제2회 동숭학술상(동숭학술재단 1998)을 받았다.

국어교육사 연구(1975), 속국어교육사 연구(1988), 자료를 통해 본 한자어의 실태와 그 교육(1988), 초등학교 학습용 기본어휘 연구(1989), 韓中漢文淵源(2000), 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서(2001), 영원한 꽃의 향기(1~5집, 1954~2003)를 발간했다.

연구소에서 고문진보, 논어, 맹자, 대학, 강의를 거쳐 현재 중용 강의 중이다.

집에서는 며느리가 차려 주는 아침의 짠 음식은 물을 부어 심심하게 하고, 다른 반찬은 다 국에 넣어 밥보다 반찬의 양이 많게 들고, 연구소의 단골 식당에서의 점심, 저녁도 같은 요령으로 든다. 집에서는 꼭 필요한 말 외의 잔소리는 일절 안한다.

80 고개에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은 마음을 비우고 봉사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1970년 한글 전용 교육정책 실시 이래 실추된 도덕과 學力 제고를 위해 새 정부에서는 초등학교 ‘국어’에서 한자 1,000자를, 중 고등학교 ‘국어’에 漢字 괄호를 벗겨, 맞바로 섞어 교육할 것을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