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평┃

 

 

문학의 몸에 새겨진 철학의 문신文身

 

                                                                                           홍혜랑

평자의 눈높이

 

인간은 조물주가 우주만물을 창조할 때 함께 참여한 적이 없다. 예술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거쳐서 나오는 ‘작품’이다. 그러기에 예술가들에게는 창작과정에서 겪는 공유의 경험세계가 있다. 공통으로 겪는 창작의 고뇌는 예술가 상호간의 대화를 가능하게 해준다. 미술보다, 음악보다, 무용보다 그 어느 장르보다 접근하기 용이한 듯 보이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문학에서의 소통은 어떤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가장 열렬한 독자는, 그리고 가장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독자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만일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평가해 주는 독자가 있다면 비록 호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문단의 최정상에 있는 소설가 L씨의 고백이다. 작가가 받아들일 수 없는 평론이라면 누구를 위하여 유익할까. 혹시 독자에게라도 작품해석의 다각적 모티브를 제공하는 데에 기여할까. 그러나 작가의 정신세계를 뛰어넘어 평자가 마치 자신의 작품을 해설하듯 작품의 안과 밖을 자유자재로 넘나들 때 이미 작품은 작가의 것이 아니라 평론가 자신의 것이 되고 만다.

작품을 보는 눈은 궁극적으로 평자 자신의 눈높이를 넘지 못한다. 수준 높은 명품을 어설픈 평자가 몸에 걸치면 평자의 체형대로 옷맵시가 달라진다. 필자도 기껏 필자 자신이 창작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동병상련의 눈으로 작품 속에서 만나보는 수준을 넘지 못할 것이다. 호도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해도, 작가가 받아들일 수 없는 독후감에 그칠 위험을 무릅쓰고 <계간수필> 봄 호의 몇 작품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순서는 봄 호의 게재순서에 따른 것이다.

 

때 묻은 배낭의 침묵

 

<쥬리아의 십자가>(송규호)

오늘날 지구상에서 한국 사람처럼 여행을 많이 다니는 백성도 없을 것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되면서 기행수필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누구나 다 가보는 관광지를 다녀 온 터에 어지간한 주제가 아니면 기행수필의 진부성을 탈피하기 힘들다.

그러나 모태에서부터 방랑자의 운명을 타고난 작가 송 규호의 여행은 예사롭지 않다. 앉은 곳에 정좌하지 못하고 어디로든 늘 떠나야 하는 그에게 여행은 나들이가 아니라 삶 자체의 일상이다.

“어쩐지 좀이 쑤신다. 또 역마살이 도지나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마음의 한구석에서 곰실거리던 그리움이다… / 그저 버리러 가는 것이 아니다. / 무언가 채우러 다니는 것이다. / 그래 / 무얼 버리고 무엇을 주워 담았는가 / 때 묻은 배낭아 말을 하여라.”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담았는지 때 묻은 배낭은 침묵한다. 등산가에게 왜 산엘 가느냐고 묻는 것이나 방랑자에게 왜 길을 떠나느냐고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질문이다. 왜 사느냐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쥬리아는 4백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카톨릭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 장수가 데려간 조선귀족의 딸이다. 세 살배기 어린애는 양어머니의 종교적 교육에 의해 자랐다. 쥬리아는 그 아이의 세례명이다. 그러나 양부 유키나가가 죽자 21살의 쥬리아는 천주교를 탄압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중을 들도록 명령받지만 끝내 거절하고 유배의 길을 떠난다. 40여 년의 귀양살이 동안 오직 사랑과 믿음으로 일관한 그녀의 묘 앞에는 오늘도 꽃을 든 참배객이 이어진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묘를 보탑(寶塔)이라고 부르며 신으로 모신다. 조선의 딸 쥬리아의 십자가는 국립공원 아리마 동산에서 오늘도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탑을 떠나면서 작가는 이렇게 읊는다.

“이제는 마을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점점 멀어져 가는 저 십자가는 앞으로 다가올 모질고 매정한 겨울을 알몸으로 받아들이겠지. 그리하여 가슴은 겨울에 피는 진홍빛처럼 더욱 뜨겁게 달아오르리라.”

작가의 때 묻은 배낭이 침묵하던 속내가 마침내 드러난다. 여행은 자신을 만나기 위한 순례의 길이다.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굳이 십자가를 찾아간 노여행자의 발길이야말로, 인생은 70고개를 넘어서도 80고개를 넘어서도 영원히 십자가와 동행해야 하는 고행임을 확인하기 위함일까.

‘앞으로 다가올 모질고 매정한 겨울’이라고 미래형을 썼지만 오히려 과거적 삶의 체험에서 얻은 생에 대한 치열한 초인정신을 느끼게 한다. ‘겨울에 피는 진홍빛’ 그것은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아수라까지를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리라. 발로 뛰는 여행이 아니라 영혼의 순례자만이 쓸 수 있는 철학적 기행문을 만난 것은 봄 호의 큰 기쁨이었다.

 

문명인이 서 있는 단애의 절벽

 

<하얀집 비탈에 서다>(이태동)

젊은 시절부터 혼신을 다해 열심히 가꾸었던 성미산 및 하얀 집은 작가에게 더 바랄 것 없는 행복한 보금자리였다.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의 시심이 작품 전체를 가로지른다.

“왠지 모르게 나는 붉은 벽돌집보다 하얀 집이 좋았고 넝쿨장미가 담 너머로 보이는 유월의 한적한 길과 오월이면 뒷산에서 풍겨오는 아카시아 향내를 호흡하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모란을 울타리 곁에 큰 라일락과 함께 심고 뜨락에는 작약과 패랭이꽃, 분꽃과 맨드라미, 그리고 봉선화들을 가꾸면서 작은 빈터를 만들었다.”

이렇듯 평화로운 작가의 삶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조용했던 집 앞길이 공사판으로 변해서 소란스러운가 하면 신흥주택들의 높은 지붕이, 내려다보이던 한강의 풍경을 막아버렸다. 도시화 물결에 밀려 하얀 집으로부터 추방당해 벌집모양의 아파트 벽 속에 갇혀 생활하게 될까봐 잠 못 이루는 작가의 두려움은 오늘날 문명인이 서있는 단애의 절벽을 느끼게 한다. 작가는 ‘왜 현대문명은 스스로 무덤을 파듯 우리가 영원히 함께해야 할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가’ 절규처럼 묻고 있다.

“닫힌 공간의 텔레비전 화면에서 아무리 많은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한들, 그것들은 모란이 봄의 뜨락에서 짙은 향기를 뿜으며 찬란하게 피어나서 소리 없이 지는 것들을 보는 것만 못하다. .... 인공적인 실내공간에 놓여있는 영상매체에서 카메라 렌즈가 잡은 철새 떼들의 날개 짓 모습을 아무리 많이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나는 만족하지 못하고 뒷산으로 올라가 먹이를 찾아 옮겨 다니는 비둘기 떼를 찾는다.”

그 어떤 첨단의 영상매체도 자연의 생명을 옮겨 올 수는 없다. 오늘날 안락한 문명에 길들여진 인류는 자신이 에덴에 살고 있지 않고 지옥에 살고 있다는 것에 점점 둔감해가고 있다. 지금 인류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식량의 감소도 아니고 인구의 증가도 아니다. 핵무기가 두렵다고 하지만,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인류를 멸망시킬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는 지구의 생명이 곧 인류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문명의 중독자들은 몸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자연 파괴의 대가로 얻은 문명의 안락함에 취해있는 인류를 어느 작가는 이렇게 비유했다. 개구리가 기분 좋게 살고 있는 수온에서 아주아주 천천히 수온을 높여갔더니 죽음에 대한 아무런 반응 없이 숨을 거두더라는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흔히 자연 사랑을 인간의 효심과 동일시한다. 하늘은 건이고 땅은 곤이니 곧 하늘은 아버지고 땅은 어머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태어난 인간이 자연을 사랑함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함과 같다. 자연을 사랑하는 정서가 인간의 효심과 다르지 않음은 굳이 동양고전의 문헌적 출처가 아니더라도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알 수 있다.

수없이 많은 환경단체들이 지구환경보존을 위해서 캠페인을 벌리며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밖에서 주입하는 의식화 운동은 잠시 사람의 의식을 고취할 수는 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영혼과 생명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생명교류를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글 한 편은, 돌아가는 길 같지만 생명회복을 위한 지름길일 수도 있다. 바로 <하얀 집 비탈에 서다>가 그런 글이다.

 

문학적 원형질의 뿌리찾기

 

<지동 댁 정초일기초>(홍억선)

머슴살이도 마다하지 않던 악전고투의 노력 끝에 지동 댁은 부농이 되었다. 조석으로 돈을 구하고 곡식을 변통하려는 사람들이 지동 댁의 삽작거리까지 줄을 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마을을 가로질러 비행장이 들어선다고 땅을 내놓으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통분할 일이었으나 서슬이 퍼렇던 군부시절이었으니 끽소리도 못한 채 땅을 빼앗기고 재산은 반 토막이 나 버렸다.

“그 참에 일가친척들은 떠밀리듯 뿔뿔이 흩어져 대처로 떠났는데, 지동양반만큼은 뼈를 묻을 고향을 버릴 수 없다하여 그 자리에 눌러앉고 말았다. …일찌감치 고향을 등진 사람들은 호시절을 만나 희희낙락한다는 풍문이 멀리에서 잘도 들려왔다. 세 끼 밥이 궁하여 바가지를 끼고 이집 저집 기웃거리던 얼금댁은 서울 변두리에 가방공장을 차렸다가 땅값이 수 백배나 뛰어 올라 억억하는 아파트에 산다고 했다.”

피땀 흘리는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눈 깜짝 할 사이의 운수와 재수에 의해서 가난한 자와 부자가 결정되는 오늘날의 부조리한 세태가 한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벌거벗은 세상의 모습이 독자에게 전달되는 순간 묘하게도 시적 변용을 일으킨다. 현실의 사실적 소재가 문학의 성(城) 안으로 입성하는 과정이라고 할까. 소위 시적사실주의 작품의 모델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직까지는 약간의 전답이 있다고 위로를 삼아왔는데 도시에 사는 자식 놈이 코 기침을 해대며 ‘그까짓 것 다 합쳐봐야 열 평짜리 아파트도 안된다’는 소리에 집구석이 망조가 났다고 여겨 정초 내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있는 것이다.”

정초 내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오고 있는 지동댁의 속마음도 속마음이지만, 어쩐지 독자의 눈 앞에는 고향을 버리고 외지에 나가 돈을 벌어 호시절을 누리는 실향민들이 오버랩 된다. 그들도 때로는 고향에 뿌리박고 사는 지동댁이 부러워 속울음을 울 것만 같아서다.

“지동양반이 지동리를 뜨지 못하는 까닭은 대대로 내려오는 우직스러움 같은 것이 내내 그를 주저앉히기 때문이다.“

도회지로 떠난 모든 실향민은 고향을 상실했다. 고향이란 우직스러운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정서적 자산이다. 신은 절대로 한 인간에게 완벽한 갖춤을 허락하지 않는 것 그것이 곧 자연의 본래 모습인지 모른다. 도회지에서 호시절을 누리는 행운과 고향을 지키는 우직스러움은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예리하게 터치한 시대 참여적 소재에도 불구하고, 짧은 글 속에서 독자가 진하게 고향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은 문장론文章論의 차원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다. 작가의 가슴이 품고 있는 끈끈한 문학적 원형질이 독자의 가슴으로 전이되는 루트는 언어를 넘어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영역이 아닐까.

 

남성보다 강한 모성애적 포용력

 

<징소리>(박영덕)

작가는 서울 친정엘 가려고 서둘러 골목을 나서다가 이웃집 남자의 자전거에 부딪친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의 징을 간신히 붙든 남자가 무어라 사과하려 했지만 택시가 오는 바람에 자리를 떴다. 그 집 남자가 친구와 동업으로 회사를 차렸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과 문화원 사물놀이 반에서 징을 배운다는 것은 동네 목욕탕에서 만난 그의 부인을 통해 알고 있었다.

“서울의 친정집에서 잠이 쉬이 들지 않아 바람을 쐬려고 베란다로 나갔다가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서울 한 복판에 반딧불이가 서식할 리는 없는 일. 나는 금새 그것이 가장들이 숨어 피우는 담뱃불임을 눈치챘다.…”

불경기의 여파로 실직이 늘어나고 있는 요즘, 가족들이 잠든 사이 홀로 베란다에 나와 뻐끔뻐끔 피워대는 가장들의 담뱃불 속에서 작가는 가족을 책임진 남성들의 고뇌를 포착한다. 그리고 징을 배운다는 실직한 이웃집 남자를 담뱃불 속에서 발견한다.

“깜빡깜빡 누구에게 조난신호라도 보내듯 깜빡거리는 담뱃불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것은 반딧불보다는 도깨비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거대한 아파트 네온사인이 번쩍번쩍 빛을 바라며 어둠을 거느리고 있다. 저런 불빛 아래선 신화를 잃은 도깨비불들은 더 초라해 질 수 밖에 없다. 문득 이웃집 남자의 마른 체구에 힘겹게 들려있던 징이 떠오른다. 그도 이 밤 도깨비불이 되었는가.”

작품의 구성이 여간 매끈하지 않다. 연상聯想의 마디마디에 전혀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다. 비단으로 고급 한복을 만드는 장인匠人의 숙련된 솜씨를 보는 듯하다.

“징소리가 듣고 싶다. 활활 타는 도깨비 불 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는 징소리가 듣고 싶다. 징소리가 듣고 싶다. 구석진 베란다에 조난된 도깨비들의 어깨에 덩실덩실 춤사위 올려놓을 그런 징소리가 듣고 싶다.”

실직의 여파로, 혹은 시원찮은 돈벌이로 인해서 주눅들은 가장들의 처지를 깊은 모성애적 시선으로 바라본 작가의 넓은 가슴이다. 사물놀이에서 징의 역할은 가족 내의 가장의 역할에 해당한다. 징소리는 본시 남성적 울림이다. 남성적 울림의 징소리를 한 여인이 이토록 활달하고 포용력 있게 표현할 수 있음은 아이러니가 아니다. 어머니의 마음, 아내의 마음 속엔 본래 그렇게 삶의 역경에서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이 숨 쉬고 있다.

실직한 가장이 배우고 있는 징소리, 그 신명의 음향에서 이 세상 남편들의 잃어버린 꿈과 희망을 살려내려는 여성작가의 마음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오늘날 한국여인의 강인한 모성애적 유전인자가 점차 소멸되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삶의 어려운 고비 고비마다 깜빡깜빡 조난신호를 보내는 남성들의 도깨비불이 점점 초라해지고 있는 세상, 그 세상 속으로 박영덕의 <징소리>가 멀리멀리 메아리쳐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