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

 

                                                                                   이상규

‘산다’는 것 그 자체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산다는 것은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이고, 생명이 유지된다는 것은 생물적인 대사(代謝)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니, 그것은 생물로서의 존재성을 나타낼 뿐이다.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은 물론이요, 식물들도 모두 매 순간 나름대로의 생명을 유지하면서 그 나름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로 한정해서 보더라도, 왜 사는가?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파고들다 보면 산다는 것처럼 알기 힘든 것도 없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지역의 일부 예외는 있지만, 의약醫藥의 비약적인 발달과 생활환경의 향상에 힘입어 근래에 들어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현저히 연장된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어릴 때만해도 마을에서 환갑을 지난 노인을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필자 스스로 희수(喜壽)를 눈앞에 두게 되었고, 둘레에 7, 80객이 수두룩하다. 요새는 환갑을 넘긴 사람들이 마치 인생은 지금부터인 것처럼 세를 부리는가하면, 이미 고희(古稀)를 넘긴지 오래인 사람도 삶에 대한 애착이 젊은이를 뺨칠 정도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산다는 것이 고생스럽다거나 번뇌투성이라고 한탄하면서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되뇌인다. 그러니,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산다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생겨난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생주이멸生住異滅의 과정을 거듭하는 것이어서, 생겨나면 반드시 변하고 마침내 사라지는 것이지만, 그 사라짐은 영원히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생김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지닌다. 현재의 순간이 멸하여 과거가 되면서 미래에게 현재의 자리를 내준다. 이러한 무한한 삼세三世의 생멸변이生滅變異의 과정 속에서 우리 삶의 시간적 상속성相續性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의 상속은 지금이라는 새로운 점의 연속이지, 결코 하나의 긴 선線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이라면 그 ‘선’이 끊길 때까지는 같은 ‘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산다는 것은 ‘지금의 순간’이라는 ‘점’위에 있는 것이어서 늘 변하고, 언제 끊길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지금의 나는 조금 뒤의 나와는 다를 것이나, 하루살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왜’ 사느냐가 있을 수 없고, 오직 살고 있다는 현상이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삶에 관념적으로 인위적人爲的인 목적이나 가치를 만들어 붙이고, 그에 집착한다.

무명無明에 가린 사람들은 산다는 것이 순간순간의 연속인지도 모르고 언제나 그 알량한 ‘나’를 중심가치中心價値로 굳게 정립해 놓고, ‘나’이외의 모든 것은 ‘너’로 대치시켜 생각한다. 대치관계對峙關係는 당연히 분별심과 경쟁심을 낳게 되어, 산다는 것은 남보다 더 갖기 위한 경쟁의 과정처럼 인식하다 보니, 산다는 것이 고뇌에 찬 나날일 것은 뻔한 노릇이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단서端緖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애당초 ‘나’와 ‘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가 ‘너’이고, ‘너’가 ‘나’인 것이다. 보는 위치에 따라 ‘나’가 되기도 하고 ‘너’가 되기도 한다. 삼라만상은 우리가 인식하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언제나 거기에 그대로 있을 뿐이다. 삼라만상을 우리가 보는 대상對象으로 설정하여 색칠을 하고 분별하여 보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를 거듭 하는 것은 살고 있는 우리의 조작造作일 뿐이다. 산다는 것은 사람에게나 다른 모든 것에나 꼭 같은 것이고, 거기에 따로 정해진 주객主客이 있는 것이 아니다. ‘너’가 있어 ‘나’가 있고, ‘나’가 있어 ‘그’가 있는 것이어서, 따지고 보면 이들은 모두 ‘우리’라는 한 집안 식구들이다. 산다는 것은 서로 의존하고 보완하면서 이어져 가는 관계속의 존재일 뿐이다. 마치, 우주속의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벌들이 서로의 중력으로 서로의 위치를 지탱하면서 정해진 궤도를 순항順航하고 있는 것과도 비유할 수 있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생겨났기 때문에 있는 현상이지만, 생겨난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고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다. 그 뿐만 아니라 산다는 것은 순간순간에 있는 것이라는 것도 분명한 일이다. 거기에서 탐욕을 부리고 분별심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괜히 번뇌만 불러올 뿐이다. 어차피 태어나 살고 있다면 무명을 걷어내고 순리順理로 살아 구경究竟에 이르러야 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마음 하나에 달린 일이다.

 

 

변호사, 문교부차관, 고려대 법대교수, 대한변협연수원장 등을 엮임.

법학자로 많은 저서를 내다가 회갑후 세속의 법에서 불가의 법으로 중심을 옮겨 불경 연구와 주석에 삼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