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황소지

살다보면 가끔 일상을 벗어나고 싶은 때가 있다. 심한 스트레스나 부당한 외부 압력이 주어졌을 때 잠재해있던 욕구가 행동을 부추긴다. 탈출의 에너지는 진보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자칫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다. 진정한 탈출이란 외형이나 내면의 질적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젊은 날, 시댁이 있는 고향에서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며 약국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시골에선 5일마다 장이 열린다. 그 곳은 각 고을의 중심지인 읍이어서 기다리던 장날이 돌아오면 많은 사람들이 장터로 몰려든다. 산촌사람들이 손수지은 곡물이며 가축을 팔아 돈을 마련하고 생필품을 사기위해 장터로 오면 우리 약국에도 많은 손님들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파김치가 되어버린 어느 여름밤이었다. 저녁까지 잘 먹고 남편과 별스럽지 않은 말로 티격태격 다투었다. 서로가 상대를 탓하며 원망하다보니 막말도 나오고, 어느새 나는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렸던지. 남편의 큰 손이 내 뺨을 후려쳤다. 눈앞이 캄캄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와, 약국 금고에 있는 돈을 지갑에 넣고 조제실에 있는 큰 약병 하나를 소리 나게 박살을 내고는 집을 뛰쳐나왔다. 약국 앞 길 건너에는 시아버님이 살고 있었고 친정은 30리 밖이다. 칠흑 같이 캄캄한 밤이었다. 친정으로 가는 길은 낮에도 혼자 지나다니기 힘든 소나무 숲이 울창한 깊은 산골짜기로 길이 험했다. 곳곳에 무덤이 있고, 여우며 도깨비가 출몰한다는 곳이다. 가는 길에 샛강도 있었지만 물에 빠져 죽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친정이래야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큰 올케가 살고 있었다.

이런 몰골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막상 집을 나서니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걸었는지 미친 듯이 걷다보니 친정에 도착했고, 먼 산자락에 동이 트고 있었다. 첫새벽에 사색이 되어 들어서는 나를 본 올케가 기절할 듯 놀랐지만 아무것도 묻지 말라며 이불을 덮어쓰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올케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점심시간이 가까웠다며 남편이 왔다고 했다. 화해할 생각이 전혀 없다며 본 체도 안했다. 그러나 작정하고 찾아온 남편은 무조건 자기가 잘못했으니 집으로 가잔다. 올케 앞에서 토닥거리며 싸우기도 민망한 일이라 못이긴 채 따라나서다가 발길을 돌려 친정 부모님이 잠드신 산소를 찾았다. 어머니 무덤 앞에 서니 갑자기 참았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소리 내어 통곡을 했다. 그 순간 남편은 저승의 어른들께 어떻게 사죄를 했는지는 모른다.

그날 밤, 내가 집을 나가자 남편은 밤중에 어디 먼 곳에 가지는 않을 거고 화가 좀 풀리면 돌아오겠지 여겼단다. 헌데 날이 밝고 아침이 되어도 사람이 안보이니 크게 당황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시댁에 있겠지 하고 갔지만 그곳에도 없으니, 어른들께 이실직고 알렸다가 시아버님께 크게 야단만 듣고는 부랴부랴 처갓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 때 나는 약국 일과 가사 일을 함께 하자니 너무 힘들어 몹시 지쳐 있었다. 내가 꿈꾸던 결혼생활이란 결코 이런 게 아닌데.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나를 꼼짝없이 묶어 버린 듯 늘 숨이 막혔다. 새처럼 날개가 있다면 어디론가 훌쩍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의 손찌검은 내 자존심을 자극했고, 숨어있던 용기가 불끈 솟아 감히 가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날 밤 혼자 밤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도 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나 눈앞에 밟히는 건 어린 것들이었고, 별달리 뾰족한 수도 없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남편은 가장으로서 성실했고 크게 결함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날 나는 한순간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일을 저질렀지만, 남편이 수습을 잘 해주었고, 못이기는 척 따랐으니 하룻밤의 탈출은 싱거운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후로 우리는 아무리 화가 나도 서로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은 삼갔다. 가출이란 쉽게 결행해서도 안 되지만 젊은 날 불같은 용기가 있었으니 지금까지 무난히 결혼생활을 이어왔는지도 모른다.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충격이며 사건이었지만, 그것도 크고 작은 일상에 묻혀 이제는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누구나 가끔 가출, 탈출을 꿈꾼다. 그것은 지금보다 나은 변화를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참된 탈출은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내 안의 나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진정한 탈출이 아닐까. 참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탈출은 내게 잘못한 이에 대한 용서, 선행하는 기쁨 등 내 안의 변화에서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1992년 <에세이문학> 통해 등단, 수필집 <바다를 닮고 싶다>외 3권,

한국문인협회 회원, 부산여성문학인회 고문, 부산문인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