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을 풀다

 

                                                                                             김명규

조급함이 극에 달할수록 좋다. 온 몸의 근육이 굳어 버릴 것처럼 다급하면 더욱 좋다. 옥죄이는 사념의 덫에서 풀려나는 순간이다. 그 찰라, 정신은 무아의 경지 깊은 고요를 맛본다. 나는 뛰었다. 이완된 근육을 단단히 묶으며 달렸다. 오직 절대적이고 순수한 일념을 품고. 마라톤 선수가 목적지의 깃발을 향해 달리듯이. 그곳까지는 정확히 아홉 개의 계단을 넘어야 했다. 에베레스트 정상보다 높고 긴 것 같다.

아슬아슬한 쾌감. 안도의 깊은 숨을 몰아쉬며 포근히 쾌감 속에 안겼다. 오그라들 것 같던 전신의 힘을 내렸다. 승리의 깃발을 거머쥔 승자와도 같이 쾌재를 부르는 내장. 스르르 눈꺼풀이 풀린다. 평안과 함께 찾아온 이 환희. 여기에 당도하기 전까지, 품고 있었던 사욕까지도 몽땅 쏟아져 나온다. 글 잘 쓰는 아무개에 대한 시샘도, 평창동 친구네 으리으리한 저택의 아른거림도 햇살에 걷히는 안개처럼 사라진다. 지금 나는 반야정관에 달한 심경이다. 청빈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나의 것이다.

묵언의 음미를 충분히 즐긴 뒤 좌르르 물을 쏟았다. 저장된 체중에서 잘려나간 만큼 가벼워진 나는 이제 날을 것 같다. 갈아 탄 전동차에 앉는다. 비워낸 어둔 터널을 타고 어느새 다시 새까만 욕망은 스멀스멀 차 오른다.

집에서 나와 삼십분도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이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 가는 길이었다. 7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이수역에 내리자 갑자기 싸르르 아랫배가 틀었다. 체면 몰수하고 궁둥짝을 치켜 올리며 황급히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신사 숙녀가 나란히 그려진 표지판이 150미터 앞에 있었다. 꿈에 떡 본 듯 반가웠다. 점점 더 복통이 심해지면서 그 거리가 천리만 같았다.

후련한 기분으로 그곳을 나오니 다시는 거기를 찾지 않을 것처럼 고마움은 벌써 사그러든다. 그래서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비유도 많이들 쓴다. 길을 가다가도 다급하면 어느 건물이나 찾아가 일을 해결할 수 있었을 때 얼마나 상쾌하던가. 우리나라도 이젠 뒷간의 문화가 선진국 못지 않다. 가는 곳마다 세면 시설까지 갖추고 청결한 걸 보면 자랑할 만한 일이다.

어젯밤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하고 수화기를 든 순간 동생의 웃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왔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거침없이 따라 웃었다. 한참 웃다가 내가 진정하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웃음을 참지 못해 진이 빠진 소리로 말을 이었다. 헬스장에서 함께 운동하는 제 친구의 얘기란다.

…… 동생 친구의 시누이가 집들이로 직장 동료들을 초대하였다. 올케로서 시누이네 집에 가 음식을 장만해주고 일손을 돕다 보니 저녁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길에서였다. 그의 집은 지하철을 내려서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종점까지 가는 변두리였다. 이것저것 맛있는 것을 과식한 탓이었는지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서있노라니 뒤가 마려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을 찾았지만 가 볼만한 건물은 거의 셔터가 내려 있었다. 정류장에서 십여 미터 거리에 마침 은행 현금지급기가 설치된 문이 보였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지급기 옆으로 좁은 공간이 있었는데 불빛이 닿지 않아 어두웠다. 바닥엔 신문지도 몇 장 포개져 있어 돈을 줍는 것보다 반가웠다. 우선 다급한 것만 게 눈 감추듯 처리하고 일어섰다. 뭣을 훔치러 들어온 것만큼 떨리고 긴장이 되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신문지를 접어 오물을 정성 들여 싸니 몸속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의 온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을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할 오물이기에 냄새가 새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이 오해할까 싶어 귀한 물건을 싼 듯 모양까지 냈다. 사뿐사뿐 걸어서 다시 마을버스 정류소로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총알처럼 날아든 오토바이가 휙 하고 달려들더니 신문지에 싸 든 그것을 순식간에 낚아채 가버렸다

동생은 제 말이 끝나기 바쁘게 또 한바탕 웃음보를 터트렸다. 현금지급기 안에서 나왔으니 대변도 돈으로 보인 날치기에게 선물 한번 잘 넘겨주었다며 나 또한 박장대소하였다. 누구나 한번쯤은 황급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건강하기에 먹으면 또 한편으로 쏟아 내놓아야 하는 신진대사의 이치를 어떻게 하겠는가. 방귀를 참으면 그 독이 몸 안으로 흡수되어 해롭다는데. 그래서 근심을 풀어낸다는 뜻의 해우소解憂所라는 말도 있거늘.

버려야 할 욕망의 찌꺼기를 담고 있을 때 우리는 고통스럽다. 그것을 비워낸 뒤에야 우리는 평화를 향하여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다급함 뒤 찾아오는 평온의 극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