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보, 뚝보, 울보

 

                                                                                       김영만

나는 잘 웃는 아이였다. 한 반 아이들이 웃음보라고 놀려댈 만큼 잘 웃었다. 웃었다라기 보다 웃어졌다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몸속 어디인가 웃음보라는 게 있어 그것이 나도 모르게 참을 수없이 자꾸 터져 나왔다. 한번은 무섭기로 소문난 역사 선생님 시간에 그의 별명인 메뚜기 생각이 나 큭큭 웃음이 터졌고 그 바람에 아이들 몇이 따라 웃어 끝내는 반 전체가 호된 기합을 받은 적도 있다.

학부모회에 다녀온 어머니가, 아무개는 다 좋은데 사람이 좀 무르고 헤식은 게 탈이라는 담임선생님 말을 전하며 걱정하시는 걸 봤지만, 그게 맘같이 쉬 고쳐지질 않았다.

이러던 내가 세월이 흘러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또 얼마 후 교장이 되었을 때, 웬일인지 웃음보와는 전연 다른 뚝보란 별명이 붙여졌다. 어느 날 저녁 회식자리에서 나이 지긋한 여선생 한 분이 부탁이 있다며, 늘 좀 웃어주세요, 그러면 보기도 좋고 뚝보란 별명을 바꿔드릴게요 하는 것이다.

이 소리에 좌중이 박수를 치며 동감을 표하는데 어찌나 면구스러운지 난 사과처럼 얼굴이 빨개져 돌아왔다. 그날 밤 누어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너무 잘 웃어 헤프고 헤식다는 소릴 들어오던 게 엊그젠데 어찌하여 이처럼 뚝보가 됐단 말인가. 그렇다고 그 말을 부인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걸어서 출근을 하다 보니 늘 같은 시간대에 같은 길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퇴근하는 내게 아내가 이런 말을 전해주는 것이다. 오늘 아침, 자기 친구네 집 이층에 사는 부인이 갑자기, 나 봤어 나 봤어하며 아래로 뛰어내려오더라는 것이다.

뭘 봤느냐하니, 이 앞길로 지나가는 아무개 선생, 오늘 드디어 웃는 걸 봤다며 손뼉까지 치더란 것이다. 매일 이층에서 내려다보며, 저 이도 웃을 때가 있을까. 아니 사람이면 웃을 때가 있겠지 하며 스스로 그 날을 기다려오다 오늘 드디어 그 웃는 걸 보았다는 것이다. 실소를 하고 말았지만 오늘 이처럼 정면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헤식다는 말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회 문제로 학교들이 홍역을 앓고 있을 때 나는 어쩌다 가장 고집이 세고 담력이 큰 교장으로 알려졌다. 어느 날 인터넷엔, 아무개는 지금이 어느 때인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법도 무시하는 통 고집, 그러나 그 고집은 만인 앞에 곧 부러질 것이다란 무시무시한 협박의 소리까지 적혀있었다.

이사장에게 불려가 주의를 듣기까지도 했는데, 그도 도대체 저 같은 고집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나도 놀랬다며 혀를 내두르더란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두고 보자며 소리치던 몇몇이 그래도 뭘 보고 참아주었는지 내 퇴임할 때 까지는 조용히 있어줘 고맙기까지 했다.

정년퇴직을 한 나는 지금 집사람이 되어 지낸다. 손주, 손녀를 친구 삼아 외롭지도 않고, 건강하여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운동을 하고 싶으면 하며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런 요즘의 내게 울보란 별명이 붙여진 것이다.

날 울보라 처음 부른 건 손녀아이다. 둘이 앉아 tv를 보다 무슨 대목에선가 울컥 눈물 쏟는 걸 보고, 할아버지는 울보라 한 것이 시작이다. 아이를 나무랄 수 없으리만치 정말 요즘의 난 대단찮은 일에도 눈물이 주루룩 흐르곤 한다. 슬픈 대목에서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김연아 선수의 피겨 타는 걸 보다가도, 이승엽이 홈런 치는 걸 보다가도 난 그만 눈물이 핑그르르 돈다. 베토벤을 듣다가 김병종의 바보 그림을 보다가 모촌선생의 수필을 읽다가 돌아서서 운 적도 있다. 어느 날부터인지 귀가 어두어져 모임에 나오면 혼자 뒷전에 가만히 앉아있다 가는 그 총명했던 친구를 바라보다가도, 토요일 날 와 자곤 이튿날 또 제집들을 찾아 돌아가는 아이들 뒷모습을 바라보다가도 난 그만 헉하고 방에 들어와 눈물을 쏟곤 한다.

“보”란 누구를 놀릴 때 쓰는 놀림말일 것이다. 웃음보, 뚝보, 울보. 그러고 보면 난 평생 사람들의 놀림감이 돼 살아온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느 책을 보니 사람의 마음도 성격도 진화를 한다하는데, 그렇다면 이런 “보”자 돌림의 나의 마음의 변화는 진화일까 퇴화일까. 아니면 생존의 적응일까. 환경에 따른 생존의 적응이라 하다면 나이도 나이겠지만 그간의 세월이 얼마나 모질었으면 이리되었을까 스스로를 바라보며 측은해 하기도 한다. 아마 내가 내 자화상을 그린다고 하면 웃음보, 뚝보, 울보가 뒤엉킨 묘한 추상화가 될 것이다. 난 그걸 바라보며 필시 또 눈물을 흘릴 것 같다.

그건 자기연민의 눈물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 밖에 알아볼 수 없이 돼버린 얼굴에 대한 고독의 눈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